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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텍스트.

임현주 한국일보 기자
mosqueen@hanmail.net

-“XXX당 OOO의원입니다. 어떤 정치적인 의도로 그런 기사를 쓰셨습니까”
=“정치적 의도라뇨? 제가 정치인입니까. 취재과정에서 알게 된 것을 기사화한 것뿐입니다.”
-“기자님이 아니라면 데스크의 의도가 있었겠죠. 그럼 인터넷만이라도 기사를 바꿔주십쇼.”
=“그렇게 못하겠는데요.”
-“그럼 제가 소송을 진행하려 하는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뚝.(신호음 끊김)

지난 여름, 법조팀으로 발령 받고 서초동에 오자마자 ‘민간인 사찰’을 취재했다.
검사들은 사실관계를 직접적으로 확인해주지 않기 때문에 “확인해줄 수 없다”는 말도 뉘앙스에 따라 답이 ‘Yes or no’ 갈라져, 가능하면 팩트 확인은 직접 찾아가서 하라고 배웠다. 서울중앙지검에서 취재했던 첫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크렘린’. 검찰 관계자는 모두 성벽으로 둘러싸여 속을 알 수 없는 크렘린 같았다. 처음부터 검찰 내부 취재가 힘들기 때문에 열심히 외곽취재를 해서 팩트를 물어오면, 가뭄에 콩 나듯 겨우 한두 개쯤 확인했다.

그렇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검찰 취재에 적응해나갈 무렵, 저녁 뉴스에 “현역 국회의원과 그 부인도 사찰 대상이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흠, 오자마자 ‘물(낙종)’을 먹었으니, ‘반까이(만회)’를 해야 하는데, 법조 경험이 없다 보니 먹성 좋은 돼지마냥 이것저것 물어보며 찾아다녔다.

불법 사찰은 분명 잘못된 것인데,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왜 현역 의원과 그 부인을 사찰했는지 그 배경이 궁금했다. 취재 과정에서 경찰과 검찰이 같은 사안, 같은 혐의를 놓고 동일 인물 2명을 피해자와 피의자 정 반대로 바꿔 놓고 수사했던 사실을 확인하고는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A의원 부인 소송 사건 당시 외압 행사 의혹”(한국일보 7월 24일자 종합5면)
모든 언론 보도 방향은 민간인 사찰이 얼마나 광범위한 대상으로 이뤄졌느냐에 있었는데, 한국일보는 그 해당 의원과 관련해 사찰했던 내용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A의원은 보도 즉시 “인터넷에 기사를 내려달라”고 연락을 했고, 취재한 입장에선 “근거가 있으므로 내용을 바꾸거나 내릴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서로 불쾌한 감정만 드러내며 전화를 끊었다.

이제 막 법조를 출입하게 된 5년차 기자는 어느 4선 의원으로부터 “소송 걸겠다”며 받은 전화가 “기사 안 내려!”라는 압박으로 들렸다. 일반인이 4선 의원을 상대로 싸운다면? 글쎄… 그 부담을 견뎌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신청했고, 나는 취재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언론중재위에 제출할 자료를 준비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겉으론 담담한 척 하면서도 속으론 “나중에 소송까지 가면 진짜 피곤해질 텐데…”라며 가슴 졸이던 ‘소심한 기자’였다.

며칠 후 언론중재위에 갔다. 작은 법정처럼 서울중앙지법에서 파견 나온 모 부장판사를 포함해 총 6분이 계셨다. 준비한 자료에 형광펜으로 밑줄 그은 부분을 근거 자료로 제출하자, 한 분께서 A의원 측 변호사에게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정정보도를 요청했나요, (A의원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리고 한국일보 법조팀장에게는 “취재 꼼꼼하게 잘했다”며 격려를 했다. 팀장은 프레스센터를 나오면서 “언론중재위에 몇 번을 왔지만, 안 깨지고 칭찬 듣긴 오늘이 처음이다”고 했다.

검찰이 공직윤리지원관실 이인규, 김충곤, 원충연 씨 등을 기소할 때쯤 서울중앙지법으로 자리를 옮겼다. 매주 화·목요일마다 집중심리가 열렸고, 틈 날 때마다 법정에 들어갔다. 기자들의 관심사는 ‘비선라인이 밝혀지느냐’였지만, 검찰이 기소한 혐의 내에서만 재판이 이뤄지니 그동안 보도된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 전개가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공직윤리지원관실 내부 라인과 갈등에 대해 기사를 썼는데 구속 기소된 B씨 부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당신이 내 남편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니 가만있지 않겠다”며 “남편이 억울하게 구속된 것도 화가 나 죽겠는데, 당신 기사 때문에 얼마나 열 받은 줄 아냐”며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했다. 결국 B씨는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취재도 힘든데, 어렵게 기사 하나 쓰면 “소송 건다, 가만 안 있겠다”며 소리 지르는 전화를 받기가 일쑤였다. 겉으론 덤덤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야근하고 집에 들어갈 때면 ‘누구 뒤따라오면서 해코지 하는 사람 없나’ 돌아보게 됐다.

이제 겨우 법조를 출입한 지 6개월. 짧은 시간 동안 지검, 지법을 거쳐 대검찰청을 출입하고 있다. 서초동은 학연·지연이 중요한 곳인데, 독특한 이력 탓에 “선배님~”하면서 넉살 좋게 찾아가 인사할 사람도 없다 보니, 법무부·대검 주최 등산이나 외부 행사는 적극 찾아 다녔다. 발품 팔고 눈도장 찍으며, 학연·지연만큼이나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가며, 아직도 ‘적응 중’에 있다.

서초동에서 검찰·법원이 돌아가는 시스템을 보며 ‘법 앞에 평등’이 아닌 ‘무전유죄, 유전무죄’인 세상인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누군가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밤늦게까지 땀 흘리는 판사, 검사, 기자들을 보며 희망을 가져본다.

한 달 전쯤, 친구가 “재밌다”며 추천해준 영화 ‘부당거래’를 보면서도 단순히 ‘재미’가 아닌 ‘씁쓸한’ 그 무언가를 느꼈던 이유도 비슷하다.
관객들이‘장인 잘 둔’스폰서 검사와 ‘배우(가상의 범죄자)를 쓴’ 광수대 에이스 팀장,‘접대와 로비를 받으며 기사를 쓴’구악 기자를 보며 웃을 때, 나는 그 어떤 외압에도 흔들림 없이 소신껏 일하고자 하는 서초동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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