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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토토에서 발행한 책자에 정리된 '대한민국 월드컵 도전사'를 올립니다.
짧게 정리가 잘 되어있네요.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영욕의 월드컵 첫 걸음
          *목숨을 걸고 뛴 한일전
한국이 제5회 스위스월드컵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극동지역 예선전을 치러야 했다. 예선전의 상대국은 일본.
FIFA 방식에 의해 홈 앤 어웨이로 도쿄에서 한 번, 서울에서 한 번 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기 이전이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인의 한국 입국을 불허했다. 결국 한국은 예선 2경기를 적지인 일본에서 가져야 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대한민국은 1차전 5-1승, 2차전 2-2무승부를 기록하며 월드컵 출전 티켓을 거머쥐었다.

         *한 대회 최다 실점의 치욕
스위스로 향하는 선수단 22명은 항공편을 구하는 것부터 벽에 부딪쳤다. 22명을 모두 태울 수 있는 비행편이 없어 2조로 나눠 스위스로 향했다. 스위스까지의 비행시간은 무려 48시간. 헝가리, 터키, 서독과 함께 B조에 속한 한국은 당시 축구 최강국이었던 헝가리를 맞아 0-9로 무릎을 꿇었다. 이는 아직도 한 경기 최다골차 패배 기록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 경기인 터키전에서도 실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0-7 완패를 당했다. 2연패를 당한 한국의 예선 탈락.

단장 김윤기 감독 김윤식
GK 홍덕영 함흥철 DF 박규정 이종갑 박재승
MF 이상의 김지성 강창기 한창화 민병대 주영광
FW 이수남 박일갑 정남식 최정민 성낙운 정국진 최영근 이기주 우상권

1958~1982년
          좌절의 시기
          *협회 실수와 정치색으로 얼룩진 침체기
1957년 한국은 월드컵 참가 신청 기간을 넘기는 바람에 예선 참가권을 박탈당했다.
1962년 칠레월드컵. 한국은 아시아동부지역 예선에서 일본을 눌렀지만 유고와의 최종예선 두 경기에서 2연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을 벼르던 한국은 강팀 북한의 등장에 지레 겁을 먹고 월드컵 예선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결국 FIFA로부터 벌금 5,000달러를 부여받았다.

          *도약을 위한 체제 확립 시작
1966년 북한의 맹활약에 자극받은 한국은 축구 발전을 위해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외국인 지도자 1호인 서독 출신의 크라우츤코치를 영입, 1년 동안 한국축구를 지도하기로 했다. 이후 유럽 원정훈련 길에 오르는 등 국제 경쟁력 강화에 힘썼지만 이후 연거푸 호주에 밀려 월드컵 참가는 좌절되고 말았다. 1982년에는 쿠웨이트에 패하며 꿈을 이루지 못했다.

1958년 최종예선 탈락, 1970년 최종예선탈락, 1974년 최종예선 탈락, 1978년 최종예선 탈락, 1982년 최종예선 탈락

1986년 멕시코월드컵
          32년 만에 본선무대 진출 감격
          *험난했던 멕시코행 티켓
한국은 1차 예선 말레이시아 원정경기에서 0-1로 패했다. 문정식 감독이 해임되고 김정남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한국은 말레이시아를 홈으로 불러들여 2-0 승리를 거두면서 조1위로 2차 예선에 진출했다. 2차 예선에서 인도네시아를 가볍게 물리친 한국은 일본과 만나 원정 1차전에서 정용환과 이태호의 골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홈에서 치러진 2차전도 허정무의 골로 승리. 1954년 이후 32년 만에 월드컵무대를 밟게 됐다.

           *월드컵 첫 골, 첫 승점의 환희
한국은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불가리아와 함께 A조에 속했다. 1차전 상대인 아르헨티나에는 당시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디에고 마라도나가 버티고 있었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0-3으로 끌려 다니던 후반 28분, 박창선이 25m 총알 중거리슛을 내리꽂아 월드컵 무대 최초의 득점에 성공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차전 상대인 불가리아와 1-1로 비긴 한국은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와 맞붙었으나 2-3으로 패하고 말았다.

단장 한흥기 감독 김정남 코치 김호곤
GK 오연교 조병득 DF 박경훈 정종수 정용환 조영증 김평석 김민국 유병옥
MF 김용세 조광래 박창선 노수진 허정무 김삼수 강득수 이태호
FW 최순호 차범근 김주성 변병주 김종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최초 2회 연속 본선무대
           *안정된 전력으로 무패행진 구가
1986년 멕시코월드컵의 주축멤버들이 대거 포함됐던 당시 대표팀은 아시아 최강국다운 전력을 뽐냈다. 한국은 아시아 1차 예선에서 네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 함께 예선 4조에 편성됐다. 한국은 6전 전승을 기록하며 무패행진을 펼쳤다. 최종예선에 진출한 6개국 중에 무실점으로 오른 것도 한국이 유일했다. 한국은 1,2차 예선을 통틀어 9승2무, 29득점 1실점을 기록하며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통틀어 최초로 2회 연속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됐다.

            *기대치 밑돈 초라한 성적
한국은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와 E조에 속해 멕시코월드컵보다 수월한 조편성을 받았다. 그러나 1차전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0-2로 패하고 말았다. 2차전은 '무적함대'스페인. 한국은 황보관의 대포알슛으로 기세를 올렸지만 1-3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예선 탈락이 확정된 한국은 우루과이전에서 명예회복을 노렸지만 후반 25분 윤덕여의 퇴장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며 0-1로 패하고 말았다.

단장 이재명 감독 이회택 코치 이차만 이세연 트레이너 허정무
GK 최인영 최풍주 정기동 DF 홍명보 정용환 구상범 최강희 박경훈 윤덕여
MF 이흥실 노수진 이상윤 김주성 이영진 정해원 조민국 정종수
FW 최순호 황순홍 변병주 황보관 이태호

1994년 미국월드컵
           10초 기적과 월드컵 진출
            *2002 월드컵 개최 기운 모락모락
한국은 아시아 예선 1차전을 무난하게 통과했다. 최종예선은 한국을 포함한 북한,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 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풀리그로 벌어졌다. 조 1,2위가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 한국은 최종예선에서 일본에 0-1로 패하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마지막 경기인 이라크와 일본의 경기에서 이라크가 후반 인저리타임에 극적인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한국을 도와 어부지리로 본선 진출권을 획득했다.

            *폭염 속에 빛난 투지
독일, 스페인, 볼리비아와 예선 C조에 편성된 한국. 한국은 첫 상대 스페인을 맞아 의외로 잘 싸웠다. 2-0으로 밀리다가 홍명보와 서정원의 골로 극적인 무승부를 이루어냈다. 이제 볼리비아만 꺾으면 16강 진출도 가능했다. 그러나 한국은 득점 없이 비기고 말았다. 독일과 3차전. 0-3으로 뒤지던 후반, 한국은 황선홍과 홍명보의 골로 맹추격하며 희망을 살리는 듯 했지만 결국 추가골을 넣지 못하고 2-3으로 분패했다.

단장 함흥철 감독 김호 코치 허정무 트레이너 박항서 오연교
GK 최인영 이운재 박철우 DF 홍명보 이종화 박정배 안익수 최영일 김판근 정종선 구상범
MF 이영진 고정운 하석주 최대식 최문기 신홍기 김주성 노정윤  FW 황선홍 조진호 서정원

1998년 프랑스월드컵
           불운과 치욕으로 얼룩진 무대
           *광란의 도쿄대첩
1996년 한국축구는 환희로 가득했다. 2002년 월드컵 개최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을 출범시켰다. 한국은 3승1무로 가볍게 1차 예선을 통과해 최종예선에 합류했다. 한국은 B조에서 일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UAE와 조1위를 놓고 다퉜다. 한국은 일본전 역전승을 포함해 6경기에서 5승1무를 거두며 일찌감치 조1위를 확정, 4회 연속 월드컵 진출을 이뤄냈다.
 
          *차범근 감독 월드컵 도중 해임
본선1승과 16강 진출 목표를 가지고 프랑스로 향했던 '차범근호'는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 한 조가 됐다. 멕시코와 1차전, 하석주가 전반 28분 선제골을 성공시키며 축제분위기를 연출했지만 2분 뒤 하석주는 백태클로 퇴장을 당하고 말핬다. 결국 1-3 역전패. 이후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에 0-5 참패가 이어지자 협회는 차범근 감독을 해임했다. 한국은 벨기에와 마지막 경기에서 1-1로 비기며 최소한의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단장 조중연 감독 차범근 코치 김평석 트레이너 정성진
GK 김병지 서동명 DF 홍명보 장대일 최영일 이민성 이임생 이상헌 김태영 장형석 
MF 유상철 하석주 최성용 김도근 이상윤 고종수 노정윤 서정원 FW 황선홍 김도훈 최용수 이동국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회를 쏘아올린 홈잔치
           *본선에서 진가를 드러낸 '히딩크호' 압박축구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은 명장 거스 히딩크 감독을 선임했다. 히딩크 감독은 파워 프로그램으로 태극전사들의 체력을 끌어올리며 많은 활동량과 강력한 압박을 요구했다. 드디어 본선 첫 경기, 한국은 복병 폴란드를 맞아 황선홍과 유상철의 기분좋은 골로 2-0, 월드컵 진출 48년만에 감격적인 첫 승의 기쁨을 맛보았다. 미국과 2차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한국은 포르투갈을 맞아 박지성의 멋진 발리슛으로 승리하며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뤄냈다.

           *골든골과 승부차기 승의 짜릿함
16강 진출에 성공한 한국.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아직도 배고프다'라는 말로 선수들의 투지를 끌어올렸다. 이탈리아전에서 한국은 후반전, 설기현의 동점골과 연장전 안정환의 극적인 골든골로 8강에 진출했다. 8강 상대는 무적함대 스페인. 한국은 전후반 90분과 연장 30분을 득점 없이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승리하며 아시아 최초로 4강 진출의 위업을 이뤘다. 이후 한국은 독일과 터키에 패하며 4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단장 이갑진 감독 거스 히딩크 코치 핌 베어벡 트레이너 박항서 정해성 김현태 
GK 이운재 김병지 김은성 DF 홍명보 김태영 최진철 이민성
MF 유상철 이영표 송종국 박지성 김남일 이을용 윤정환 최성용 현영민 최태국 
FW 황선홍 최용수 안정환 설기연 이천수 차두리

2006년 독일월드컵 
            기대감에 비해 허무했던 '라인강의 기적'
            *중동의 모래바람을 잠재우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 업적을 이뤘던 한국이기에 최종예선 통과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한일월드컵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해외에 진출했던 박지성과 이천수, 이용표 등 4강 주역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이로 인해 한국축구가 고전을 면치 못했던 중동팀들도 이제 더 이상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예상대로 본선 진출 성공. 그러나 한국은 조 본프레레 감독을 퇴진시키고 딕 아드보카트 감독 체제로 월드컵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월드컵 원정 첫 승에 만족
본선 1차전 상대는 월드컵 무대에서 처음으로 만난 아프리카팀인 토고. 한국은 먼저 첫 골을 내줬지만 이후 전열을 정비하여 이천수의 동점골과 안정환의 결승골로 기분 좋은 역전승을 이뤄냈다. 2차전 상대는 프랑스. 한국은 프랑스를 상대로 잘 버텨내며 무승부를 기록, 16강 꿈을 이어갔다. 하지만 끝내 스위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16강 탈락의 아픔은 너무나도 컸다.

단장 이회택 감독 딕 아드보카트 코치 핌 베어벡 압신 고트비 홍명보
GK 이운재 김영광 김용대 DF 이영표 김상식 김영철 송종국 조원희 김동진 최진철 김진규
MF 이을용 백지훈 이호 김남일 박지성 김두헌 
FW 박주영 설기현 이천수 정경호 조재진 안정환

2010 남아공월드컵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금자탑
            *국내 지도자는 안된다는 불신 여전
2007년 12월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게 된다. 허정무 감독은 2000년 이후 7년 만에 다시 대표팀 사령탑에 복귀했다. 허 감독 부임 후 한국은 A매치 무득점 공포를 이겨냈지만 여전히 시선은 곱지 않았다. 감독 교체설까지 흘러나왔다. 그러나 대표팀은 꾸준하게 승점을 챙기며 전진했다. 한국은 허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 데뷔전인 칠레전에서 패한 뒤 최종 예선까지 10경기(5승5무) 연속 무패행진을 달렸다.
      
             *최악의 조편성을 '허심'으로 뚫다 
한국은 최종예선에서 최악의 조편성을 받게 된다. 예선 2조에 속한 한국은 중동의 강자 사우디와 이란에 껄끄러운 상대 북한, 복병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남아공 티켓을 다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비마다 젊은 선수들과 고참선수들의 조화로운 플레이로 난관을 극복하며 마침내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뤄냈다. 최종예선을 4승4무로 마무리했다. 한국은 아르헨티나, 그리스, 나이지리아와 함께 본선 B조에 속해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감독 허정무 코치 정해성 김현태 박태하 (월드컵 예비명단)
GK 이운재 정성룡 김영광 DF 차두리 곽태휘 김형일 이정수 이영표 오범석 조용형 김동진
MF 김남일 기성용 김정우 박지성 이청용 신형민 김재성 김보경 구자철 염기훈
FW 이승렬 안정환 박주영 이근호 이동국

2010년 6월 23일 한국은 나이지리아를 누르고 원정경기 사상 처음으로 16강전 티켓을 손에 거머쥐었다. 그리고 26일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 1-2로 아쉽게 패하며 2010 남아공월드컵을 아쉽게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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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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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세계선수권대회를 다녀오고 장미란 선수와 관련된 예전 기사를 추억해봅니다.
관련 기사들을 찾아 올려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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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스포츠] 태릉선수촌 ‘영어 삼매경’
2007년 7월 4일자 경향신문

“영어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어요.”

 

여자 역도 간판스타 장미란(24·고양시청)과 세계 최강 빙상 스프린터 이강석(22·의정부시청)이 요즘 태릉선수촌에서 영어를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낸다. 입촌 국가대표 선수들을 위해 개설된 주 2회 영어회화 수업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선수반(월·수), 지도자반(화·목) 수업이 오후 7시30분에 시작하니 ‘주경야독’인 셈이다. 낮 훈련, 밤 공부.

지난 2일 태릉에서 만난 장미란은 막 한글을 깨우쳐 글 읽는 재미를 붙인 아이처럼 영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업 없는 날에도 운동 끝나면 영어 CD를 반복 청취하는 낙으로 생활한다”고 자랑했다. 훈련 스케줄 때문에 지도자반에서 수강 중인 장미란은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말하는 게 부끄러웠는데 요즘은 한결 자신감이 붙었다”며 “훈련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영어 공부에 거의 다 투자한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미국 세계선수권대회 500m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건 이강석의 영어 공부 열의도 만만치 않다. 그는 “국제무대에서 자신있게 영어 인터뷰를 하고, 외국 선수들과 영어로 더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게 바람이었다”면서 “태릉에서 ‘말하기’ 위주로 가르치기 때문에 더 관심을 갖고 수업을 듣는다”고 전했다.

태릉 영어회화반에서는 딱딱한 문법 대신 국가대표들이 익혀두면 좋은 실용 표현을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국제공항이나 해외 전지훈련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는 방법 등이다.

선수촌 영어강사 김나라씨(34)는 “미란이나 강석이는 태릉에서 영어 공부 열심히 하기로 소문났다”며 “다른 선수들도 자극을 받았는지 최근들어 수업 참여율이 부쩍 높아졌다”고 전했다.

체조 국가대표 출신으로 은퇴후 8년간 미국에서 살았던 김씨는 “선수들이 ‘선생님’보다는 ‘태릉 선배’로 생각해 더 수업을 잘 따라온다”면서 “후배들이 ‘국제 선수’로 성장하는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임현주기자〉

*^^*  2009년 11월 현재.  장미란 선수는 여전히 태릉에서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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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란 ‘살 찌우기 전쟁’…아직도 15㎏ 부족해요
2007년 9월 14일자 경향신문

“남들은 빼느라 힘든데, 저는 살찌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요.”

‘여자 역사’ 장미란(24·고양시청)이 2008 베이징올림픽을 향해 ‘살과의 전쟁’에 들어갔다. 그가 소망하는 몸은 보통 여성이 그리는 날씬한 몸매가 아니다.



이미 100㎏을 넘긴 체중인 데도 몸을 더 불리는 게 목표다. 올림픽에서 여자 최중량급(+75㎏)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서는 중국 라이벌 무슈앙슈앙과 비슷한 체격 조건을 만들어야 제대로 파워를 쏟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는 16일부터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리는 제19회 세계여자역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장미란은 지난 두달 동안 어렵게 3㎏을 불려 현재 117㎏이 됐다.

하지만 무슈앙슈앙(132㎏)과는 아직도 15㎏이나 차이가 난다. 작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무슈앙슈앙에게 진 원인 중 하나가 그에 비해 왜소한(?) 체격조건 때문이라는 분석이어서 장미란에게 체중 불리기는 꼭 성공해야 할 과제다.

여자대표팀의 오승우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는 장미란이 120㎏을 넘길 경우 최근 연습기록인 인상 135㎏, 용상 173㎏을 넘어서 인상 140㎏, 용상 180㎏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판단이다. 현재 인상 세계 최고기록은 무슈앙슈앙의 139㎏이고, 용상은 옛 라이벌 탕공홍(중국)이 갖고 있는 182㎏이다.

일반적으로 역도선수가 체중 1㎏을 불리면 기록이 3~5㎏가량 향상되지만 무제한급 선수에게는 이 공식이 맞아떨어지진 않는다. 오감독은 “당초 계획은 9월까지 120㎏을 넘기는 것이었는데 갖은 방법을 동원해 무던히 애썼는데도 실패했다”며 아쉬워했다.

태릉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하루 평균 재료비만 1인당 2만4000원이 책정돼 영양 많은 고칼로리 음식이 대부분이다. 점심 한끼에도 볶음밥, 스테이크, 파스타, 튀김, 국수, 빵, 케이크, 우유 등 보통 사람들이 3끼에 걸쳐 나눠 소화할 수 있는 다양한 음식들이 제공된다. 하지만 장미란 만큼은 태릉에서 주는 음식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목표달성을 위해 취침 직전에도 간식을 먹었고, 최근에는 매일 저녁 외식을 했지만 그래도 쉽게 살이 오르지 않았다. 오감독은 “미란이가 무리하게 체중을 늘려야 하는 상황이다보니 부담이 컸던 것 같다”며 “최근에는 호흡이 가빠지고 몸이 둔해져 일단 멈췄고, 대회가 끝나면 다시 더 찌우기로 했다”고 말했다.

장미란은 새벽부터 하루 종일 충실히 훈련하기 때문에 많이 먹어도 그만큼 칼로리를 많이 소모해 어려움이 많다. “아무리 먹어도 훈련하고 나면 땀으로 다 빠져나가는데 어떡해야 하나”라는 게 장미란의 하소연.장미란은 이번 세계선수권에서 대회 3연패에 도전한다. 오감독은 “몸에 무리가 되지 않는 차원에서 경쟁시킬 것”이라며 “기력을 노출하면 안되고, 부상을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 컨디션에 맞는 작전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오감독은 “최근 들어 미란이의 근력과 밸런스가 많이 향상돼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장미란은 대회 마지막 날인 26일 오후 4시30분 최중량급에 도전한다. 오감독과 경량급 선수들은 14일 출국하고, 장미란은 19일 현지로 떠난다.

〈임현주기자〉

*^^* 장미란 선수는 남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역도선수로 세계 정상에 우뚝서기위해... 그런데 훈련량이 너무 많아서 먹어도 먹어도 계속 115kg대를 유지하더라고요. 이번에 대회 때도 몸무게가 115kg대였어요.
실제로 장 선수를 만나면 근육량 때문에 무게가 그리 많이 나가 보이지 않아요.
훗날 운동을 그만두면 장 선수도 지금과는 정 반대의 고민을 하겠지요.

언젠가 장미란 선수가 그런 말을 한적이 있어요. 역도를 처음 시작했을 당시 몸무게가 75kg 초반대였나 60kg대였나 그랬는데, 그때 아무도 저 체중급으로 준비하란 말을 안해줬데요. 그냥 살을 계속 찌워서 75kg 이상급 선수들과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군요. 중 3때 운동 시작해서 30-40kg를 찌운 것인데 얼마나 고생했겠습니까. 실제로 장미란 선수를 만나보면 몸이 모두 근육이어서 화면에서 보는것 보다 더 날씬합니다.
그냥 '통통하다'는 느낌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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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란 새해소원은 “복학” 이다
2007년 12월 26일자 경향신문

여자역도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장미란(24·고양시청)이 한달 가까운 해외전지훈련을 마치고 돌아왔다. 중국, 일본에서 보름씩 훈련하고 지난 24일 서울 태릉선수촌으로 복귀한 장미란은 짐을 풀자마자 훈련 일정부터 점검했다. 크리스마스 아침부터 빡빡하게 짜여져 정말 쉴 틈이 없다.




새해 장미란의 가장 큰 목표는 물론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이다. 4년전 아테네에서 중국선수에 유리한 판정으로 은메달에 그쳤던 한풀이를 꼭 하고 싶다. 장미란은 올림픽 금메달만큼이나 바라는 게 있다. 장미란이 새해 반드시 이루길 소망하는 ‘▒’는 바로 ‘복학’이다.

2005년 체육 특기자로 고려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한 장미란은 지난 2월 전 소속팀 원주시청을 떠나는 과정에서 이중등록 문제가 불거져 3학년 진학을 포기했다. 실업팀 소속으로 대학에 진학해 공부하는 선수는 장미란 외에도 많지만 사실상 사문화된 대한체육회 규정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하는 수 없이 학업을 멈추고 고양시청으로 옮겨야 했다.

장미란은 “전에는 베이징 올림픽까지 열심히 해서 운동을 빨리 마치고 공부할 생각이었는데 최근에 목표가 바뀌었다”면서 “힘과 기량이 닿는 한 2012년 런던올림픽, 그 다음 올림픽까지라도 운동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인생의 계획을 수정하면서 학업을 빨리 마쳐야 한다는 생각도 절실해졌다”며 “태릉선수촌과 고려대가 지하철(6호선)로 여섯 정거장밖에 안되는 가까운 거리인데도 갈 수 없다”며 안타까워 했다.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한번도 접은 적이 없다는 장미란은 “새해에는 대한체육회 규정이 바뀌어 실업팀 소속 선수들도 자신의 장래를 위해 학업에 투자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캠퍼스 생활에 대한 아쉬움도 많다. 대학 시절 동기생들보다 3년 늦게 입학하는 바람에 ‘언니’ ‘누나’로 불렸는데 그때는 낯을 많이 가려 제대로 친구 한명 사귀지 못했다. 장미란은 “다시 학교에 간다면 적극적으로 대학생활을 해보고 싶다”고 열망했다.

장미란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없는 한을 태릉선수촌에서 운영하는 영어수업을 받으며 대신 풀었다. 예습, 복습 철저히 하고 국제대회나 전지훈련을 가면 그대로 활용했다. “선생님, 그때 배운 것 이렇게 써먹고 왔어요”라며 기뻐했던 그다.

장미란에게 대학 복학은 너무도 간절하고 절실한 소망이다.

〈임현주기자〉

*^^* 2007년 크리스마스날, 장미란 선수가 일본에서 전지훈련을 마치고 귀국했어요. 영광스럽게도 크리스마스를 장미란 선수와 함께 보냈던 것이죠. 이 기사가 나가기 전에도 대한체육회 규정 관련해서 문제가 있다는 기사를 썼고, 선수를 배려하는 규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때 기사들이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네요.
어쨋든 2008년 초에 장미란 선수는 복학에 성공했습니다. 2010년 2월에는 장미란 선수가 졸업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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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하고 짬내서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봤어요.
장미란 선수를 추억하다보니 '기자'라는 직업에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되네요.
현장에서 늘 '중심'에 서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하고, 알게되는 것.
르포나 현장취재, 인터뷰를 하다보면 뽀빠이가 시금치 먹은 것 처럼 힘이 솟아요.

기자라는 직업을 통해 좋은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고, 많이 배웠습니다.
지금도 물론 그 과정에 서 있고요.

이런것이 보람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
회사에 회의하러 들어가야하는데, 그럼 다음에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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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1월 28일(토)  저녁 7시.  일산 킨텍스 전시장에서 열린 2009 역도 세계선수권대회 현장에
            갔습니다.  장미란선수(75kg+) 경기를 보기 위해서였지요.  장미란 선수 얘기로는 고양시 세계선수권대회 
            규모가 2008 베이징올림픽 역도 경기장보다 훨씬 컸다고 합니다.  장미란씨의 경기를 보기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렸고, 무대를 정면으로 왼편에 자리를 맡았지요.



          (사진설명/ 29일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09 역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남자 77kg급 금메달
          사재혁(오른쪽) 과 임현주기자.)

           어디서 많이 본 선수? *^^*  남자 77kg급에서 금메달을 딴 사재혁 선수죠. 사재혁은 장미란의 후배지만
          두 사람은 아주 각별한 사이입니다. 선후배를 떠나 선의의 경쟁자이면서,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동반자'같은 존재?...
          사재혁 선수 경기는 화요일(24일)이어서 관중들이 많지 않았다던데, 나름 장미란선수에 대해 질투를
          하더군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역시, 장미란의 위력은 대단해...!"
         "내 경기날은 이런 응원도구도 없었는데...OTL"

          사실 사재혁 선수 경기날도 제가 손에 들고있는 저 응원도구를 나눠줬다고 하네요. 그런데 역도는
         프로종목과 달라서 팬들이 무언가를 들고 단체로 응원하는게 아직 익숙치 않아 다들 갖고만 있고, 펼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장미령씨(장미란 동생)에게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 싸군(사재혁 선수)을 위로해줬죠.


          대회시간이 오후 7시에 시작할 예정이었는데, MBC 중계 일정때문에 15분 지연됐습니다. 바로 눈 앞에
          펼쳐진 무대에서 장미란 선수의 경기를 보게되는게 제가 다 긴장되더라고요.   2007년 체육부에서
          장미란선수 경기를 취재한 뒤 2~3년만에 현장에서 직접 보는 것이니까요.

           장미란선수가 입장하네요. 카메라가 흔들려서 '월리를 찾아라'처럼 장미란을 찾아야겠지요?
           체격이 비슷해보이지만 장미란선수는 앞에서 5번째네요. (인솔자 포함)




            장미란선수가 많이 긴장한것 같네요. 살짝 경직된 자세로 손을 흔들며 관중을 향해 인사를 하죠.

            역도 경기장에서 태극기의 물결이 휘날리는 것은 처음 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재혁 선수는 감탄을
            하더군요.  "내 경기날은 볼 수 없었던 관경인데...." 아쉬워하기도 했고요.
          (여러분, 2008 베이징올림픽에 이어 2009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차지한 사재혁선수도 많이 응원해주세요!)




          인상을 준비하고 있는 장미란 선수 모습이죠.  막상 장미란 선수 경기가 시작된 뒤로는 긴장되서 사진을
          못찍었네요.  찍을 정신이 없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요.


          장미란은 인상에서 136kg을 들어올리며 은메달을 확정지었죠. 90kg 18세 러시아 소녀의 괴력을 본 뒤
          저도 살짝 긴장했습니다.  용상에 앞서서는 정말 기도하는 심정으로 경기를 봤지요. 이번 세계선수권대회를 
          준비하면서 휴가도, 명절도, 주말도 없이 태릉선수촌에서 밤낮으로 고생했던 장미란 선수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면서요.

         용상 1차시가 실패. 2차시기때 174kg 성공. 이미 용상 금메달, 합계 금메달은 예약이 된 상황이었죠.
         그리고 3차시기.., 장미란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기록을 넘어야하는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의 끝이 다가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설마... 잘 할 수 있겠지?... 잘 할거야.
         장미란선수가 175kg부터 무게를 올리며 시간을 확보하는 과정에 무대 뒤편에서 두 눈을 감고 이를 꽉 물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정말 얼마나 간절했던지.. 저도 제 손을 꽉 쥐었지요.

         장미란은 침착하게 바벨을 잡았고, 기적같이 세계신기록 187kg을 들어올리며 영광의 기쁨을 맛봤습니다.



           장미란 선수가 환하게 손을 흔들며 웃고 있습니다. 자신을 격려해줘서, 고맙다고 웃으며 인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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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왕십리 CGV에서 영화 국가대표를 봤다.


국가대표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누구는 엄마를 찾기 위해, 누구는 병역 특례를 기대하며 그렇게 스키점프를 시작했다.

운동 시설도 전혀 갖춰지지 않은 무주에서 시설만큼이나 어설픈 훈련을 한다. 후보 선수 한명 없이 주전만이 존재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국가대표였다. 가슴에는 태극마크를 달고 등에는 자랑스러운 ‘KOREA’가 적혀 있는 옷을 입으며 매일같이 땀을 쏟아냈다. 그 땀방울이 모여서 가슴 속에 ‘열정’을 자라게 했고 그렇게 그들은 어느덧 진정한 국가대표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에서 무주가 탈락하자 팀은 곧 해체위기에 놓인다.

그렇다. 그들은 처음부터 전시용이었다. 한국이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취약한 동계스포츠종목을 조금이나마 활성화 시켰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이벤트 성으로 만들어진 국가대표였던 것이다.


영화를 통해 우리나라가 왜 수차례 동계올림픽 유치에서 실패를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올림픽 개최에만 눈이 어두워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사람을 키우고 투자할 여유는 없는 게 현실이다. 2010년 밴쿠버, 2014년 소치 등 수차례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했지만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서 스피드 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 이강석 선수가 떠올랐다. 2007년 3월 이강석 선수가 세계신기록을 갈아 치웠던 그가 귀국 후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빙상종목은 쇼트트랙밖에 없다. 늘 쇼트트랙의 그늘에 가려 지원도, 관심도 없는 곳에서 항상 설움을 느끼며 훈련했다’고 회상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강석은 어린시절 집안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겨울에 논이 얼면 그 위에서 스케이트를 신고 연습하곤 했다.


영화 ‘국가대표’를 통해 얻은 메시지는 환경을 탓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진정한 국가대표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스키점프, 스피드스케이팅 등 스포츠에도 수십, 수백가지 종목이 있듯이 우리네 인생에도 너무나 다양한 직업이 있다. 교사, 환경미화원, 운전사, 정치인, 회사원 등 누구나 자기가 서있는 위치에서 열정이란 에너지를 쏟아낼 때 우리도 진정한 국가대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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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호 월간조선 /임현주 경향신문 체육부 야구전문 기자
  [인물연구] 2007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제패한 김성근 SK 감독
 2006년 6위 팀을 우승까지 견인한 힘은「무한 경쟁」
 
한 번 날아간 공은 다시 오지 않는다!

1942년 일본 교토 출생. 일본 교토 가쓰라高 졸업, 동아大 중퇴, 교통부 선수,
기업은행 선수, 마산商高 감독, 기업은행 감독, 프로야구 OB 코치, OB 감독,
태평양 감독, 삼성 감독, 쌍방울 감독, LG 감독. 일본 지바 롯데 마린스 코치 역임.
현재 SK 감독.

프로감독 데뷔 23년 만의 첫 우승

가을밤이 깊어 가던 지난 10월29일 인천문학구장.
 
  SK 와이번스 金星根(김성근·65) 감독은 프로야구 감독 데뷔 23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2연패를 한 뒤 4연승 하는 진기록을 추가했다.
 
  지난 10월31일 오후 2시. 서울 청담동 리베라호텔 커피숍에서 金星根 감독을 만났다. 같은 시각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는 프로야구 2007 신인왕과 MVP 시상식이 열리고 있었다.
 
  『11월5일 일본으로 출국할 예정이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는 金감독을 졸라 어렵게 시간을 만들었다. 청바지를 즐겨 입는 金감독은 짙은 남색 면바지에 흰색 셔츠, 검은색 니트를 입고 나왔다.
 
  ―이틀 동안 좀 쉬셨나요.
 
  『우승하던 날 샴페인 세례를 받아서 감기에 걸렸어요. 시즌 때는 경기 구상을 하느라 두세 시간밖에 못 잤는데, 요즘은 감기 때문에 잠을
설쳐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소감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너무 정신없이 지나갔거든요.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축하전화를
 받을 때 우승했다는 실감이 나요』
 
  ―우승하고 가장 먼저 생각났던 사람은 누군가요.
 
  『집사람이죠. 40년 같이 살면서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항상 나를 위해 기도해 줬고, 말없이 곁에서 힘이 되어 줬습니다』
 
  ―「야구의 神」이라는 별명을 갖고 계신데, 어떻게 생긴 건가요.
 
  『삼성 김응룡 사장이 붙여 준 별명이지요. 2002년 LG를 이끌고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서
삼성한테 2승4패로 졌어요. 김응룡 사장이 한국시리즈 우승 후 인터뷰에서 저를 「야구의 神」
이라고 불렀대요. 시합에 진 내가 神이면, 神을 이긴 사람은 뭡니까(웃음).
하늘인가요?』
 

지난 10월29일 인천문학야구장에서 열린 2007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SK가
두산을 맞아 승리한 후 SK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다.

 
  「야구의 神」
 
  ―김응룡 사장이 「야구의 神」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시즌 내내 LG가 삼성만 만나면 성적이 형편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시리즈에 나선
김응룡 감독이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이더라고요. 그동안 삼성만 만나면 필요 이상으로
긴장했는데, 삼성도 우리와 똑같은 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여유를 가지니까 金감독의 수가 보였어요. 제가 김응룡 감독을 읽으니까, 金감독이
고생을 많이 했죠. 그래서 저를 「神算(신산)」이라고 평가해 준 모양입니다』
 
  ―정규시즌에서 1위를 차지해서 한국시리즈로 직행한 SK가 한국시리즈 1·2차전에서
연패했습니다. 왜 그렇게 됐나요.
 
  『이번 시즌에 두산만 만나면 참 힘이 들었어요. 어차피 일곱 경기 중 4승을 먼저 한 팀이
이기는 것이니까, 한국시리즈 1·4·7차전을 내주고 2·3·5·6차전을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했어요.
 두산 에이스 리오스 선발 때는 과감하게 경기를 내주고, 나머지를 잡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초반부터 계산이 어긋났습니다. 두산이 워낙 강하다는 인식이 박혀 있어서
저나 선수들이나 많이 긴장했어요.
2차전에서 예상했던 시나리오가 빗나갔고, 어긋난 계산에 집착하다 보니 선수교체
타이밍을 계속 놓쳤습니다』
 
  ―金星根 감독의 상징은 「데이터 야구」입니다. 왜 1·2차전에서 계산이 맞지
않았나요.
 
  『정규시즌 1위를 확정짓던 날(9월28일) 한국시리즈 맞상대로 두산을 염두에
뒀습니다. 두산에 관한 데이터를 집중분석했고, 두산 선발투수에 맞춰 「맞춤훈련」을
 시켰습니다.  두산은 어리고 경험 없는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보이고 있었어요.
발 빠른 두산의 이종욱과 고영민의 도루 견제를 위해 「피치 아웃」 훈련까지
 했으니까요. 너무 데이터에 집착하다 보니까 조금만 계산이 어긋나도 생각이
복잡해지더군요』
 
김성근 감독은 자신만의 기록법을 개발해 경기상황을 실시간으로 적는다.
고등학교를 일본에서 나온 까닭에 일본어로 쓰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한다(사진 왼쪽).
1982년 OB 코치시절부터 야구일기를 써 왔다(사진 오른쪽).

 
  『무한경쟁은 기회를 공평하게 주는것』
 
  ―3차전 이후 분위기가 확 달라졌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3차전부터 데이터에 집착하지 않았어요. 「작은 것에 집착하기보다 타이밍을 놓치지 말자」
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차피 4승을 챙겨야 끝나는 게임이니까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선수들에게 「편하게 경기를 하라」고 주문했더니, 3차전부터 선수들 방망이가
터졌습니다.
 3차전에서는 우리 선발투수 로마노가 잘 던져 줬고, 4차전에서는 왼손 투수 김광현이 잘
해줬습니다. 2패 후 2승을 챙기니까 자신이 생기더군요. 말을 아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준비했습니다』
 
  ―3차전 「빈볼싸움」 이후 SK 선수들의 氣(기)가 무섭게 살아났는데.
 
  『SK 선수들은 정말 순박하고 순진합니다. 누구 하나 나서거나 말 많은 선수가 없습니다.
두산은 베테랑 선수 홍성흔, 김동주 등 경험 많은 선배들이 후배들을 이끌잖아요.
「파이팅」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팀입니다.
 
  단기전에서는 선수들의 氣가 특히 중요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 들지 말고, 절대
 氣싸움에서 밀리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선수들이 그 지시를 잘 지켜 줬던 거죠』
 
  ―2007 시즌 동안 SK에는 고정된 4번타자가 없었습니다. 타순과 수비 위치를 매일
바꾸셨죠.
「토털 야구」, 「벌떼야구」라는 이름을 얻었구요. 무한경쟁이 선수들에게 큰 마음의
짐이 됐을 텐데.
 
  『1년 전 SK 선수들을 고려대학교 송추 구장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때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형편없었어요. 「이렇게 야구를 하니까 2006년 시즌 6위를 했구나」 싶더라고요. 저는 「이기는 야구」가 뭔지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무한경쟁은 반대로 말하면 기회를 공평하게
 준다는 얘기입니다. 한두 명의 스타 플레이어에 의존하지 않고, 모두 노력해서 발전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지요』
 
 
  『하고자 하는 의욕과 열정이 생겼다』
 
김성근 감독이 끼고 있는
반지는 지바 롯데 마린스
 코치 시절 2006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김감독은 코치로서
「2006년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으로서「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진귀한 기록을
세웠다.

  ―지난 1년간 SK 선수들이 가장 변화된 부분은 뭔가요.
 
  『하고자 하는 의욕과 열정이 생겼지요. 그게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한국시리즈에 나서면서 선수들에게 「야구장에서 절대 고개 숙이지 마라. 자신 있게 해라. 즐겨라」 했습니다. 김재현, 박재홍, 박경완 같은 고참들이 옛날 전성기 때의 스윙을 되찾고, 어린 선수들이 기대 이상으로 좋은 경기를 보여 줬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선수들이 깨달았습니다. 2008년에도 SK의 무한경쟁은 계속됩니다. 「선발 라인업 고정」이 무리라는 것을 선수들이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2007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되던 날 기자들을 한바탕 웃게 만든 소동이 벌어졌다.
 
  점잖은 金星根 감독이 잠실 원정경기에서 3연승을 챙긴 그 느낌을 간직하려고 점퍼 속에, 원정경기 때 입는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날씨가 쌀쌀했던 탓에 金감독은 원정 유니폼 입은 걸 들키지 않았다. 선수들이 헹가래를 치고 샴페인을 퍼붓는 동안에도 감독은 점퍼를 벗지 않았다. 우승 시상식을 하기 위해 우승 기념 티셔츠를 갈아입으려고 金감독이 점퍼를 벗는 순간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金星根 감독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올 시즌에 또 하나의 「징크스」가 생겼습니다. 시즌 중에 집에 다녀오는 날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입니다. 이번 시즌 후반에 원정경기를 가기 전 집에 들렀다 가면 그 경기는 꼭
이기더라고요. 시즌 후반부터는 원정경기를 하러 아무리 일찍 출발해도 무조건 집에 들렀다가
갔습니다』
 
 
  아들 김정준이 말하는 金星根 감독
 
김포공항으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사진
왼쪽부터 김성근 감독의 외아들 김정준씨,
김성근 감독, 임현주 기자.

  SK 전력분석원 팀장 김정준(37)씨는 김성근 감독의 외아들이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김정준씨는 충암中·高를 거쳐 연세大에서 선수생활을 계속했다. 1992년 LG에 입단하며 프로선수가 됐다.
 
  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1년 반 만에 선수생활을 접었다. 이후 11년간 LG 전력분석원으로 일을 했다. 2001년 시즌 중간에 부친 金星根 감독이 감독대행으로 LG로 부임했고, 처음 함께 일을 했다.
 
  2001년 6위였던 팀을 1년 만에 2위로 끌어 올렸는데, LG는 김성근 감독을 해고했다. 김정준 전력분석원은 LG를 떠나 2003년부터 SK에 몸을 담았다. 지난 11월3일 오전 9시30분. 김정준 팀장과 서울역에서 만났다. 3시간 동안 KTX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金星根 감독이 SK 감독직을 제안받았을 때 처음에 거절했고, 가족회의 끝에 마지못해 SK행을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일본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의 코치를 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편한 시간을
보내고 계셨어요. LG 감독을 그만두시고 일본에서 자리 잡아 롯데 마린스가 우승까지 해냈잖아요.
또다시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 돌아오기 싫으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일본에 계실 때
「코치가 이렇게 편한 줄 몰랐다」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일본에 남기를 원하셨는데 가족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었어요. 막내 동생 희성이가 아버지 밥 해드리느라 2년 가까이 일본에서
생활했어요. 동생도 나름대로 지쳐 있었고요. 그래서 가족들이 모두
「SK 감독을 하셨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다시 1년간 함께 일해 보니 어떤가요.
 
  『아버지가 한국에 오시기로 결정하고나서 저를 불러서 「3년 정도 일본에서 공부를 하라」고
했어요. 롯데 마린스에서 저를 연수시키기로 얘기가 다 끝난 상태였어요. 월급은 70만 엔을 주고,
아버지가 일본에서 사셨던 집을 그대로 쓸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저야 배우는 입장에서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거절했습니다』
 
 
  감독이라는 고독한 직업
 
  ―그렇게 좋은 기회를 왜 잡지 않았나요.
 
  『앞으로 아버지 얼굴을 보고 함께할 날이 많이 남지 않았더라고요. 전에 LG 감독 하실 때 정말
힘들었던 과정이 자꾸 생각났어요. 이번만큼은 꼭 곁에서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어요. 어머니께서
제가 아버지와 함께하기를 바라셨고요. 지금 돌아보니 그때 결정을 참 잘한 것 같아요.
 
  경기에서 진 날은 감독실에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수석코치도 못 들어가죠. 한번은 아버지
혼자 머리 싸매고 계시는 감독실에 들어가서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가 나왔어요.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아버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죠. 「대장이 힘들어하면 어떻게 합니까. 힘내세요.
사랑합니다」 라고요』
 
  ―한국시리즈 초반에 2연패 했을 때는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2연패 하고 하루 쉬었잖아요. 충격이 너무 커서 제가 삭발을 했습니다. 두산 선수들의
모든 정보를 모으고 철저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허무하게 무너졌거든요. 그날 감독실에
새벽 1시까지 불 켜진 것을 보고 나왔어요. 아버지는 새벽 4시까지 3차전 고민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경기를 포기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더라고요. 아버지 입장이 한번 되어 봤어요.
 
  아버지는 이미 내 나이 때 감독을 하고 계셨고, 스무 살 청년 때 혈혈단신으로 한국 땅을 밟으셨는데
 위기의 순간에서 청년 김성근은 어떻게 했을까? 아버지라면 도망가지 않았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시작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머리를 잘랐습니다. 선수들이 제 머리를 보고 자극을
받은 것 같아요. 제가 삭발한 걸 보고 아버지도 놀랐다고 하시더라고요』
 
 
  「빈볼싸움」의 영향
 
한국시리즈 우승 자축연에서 SK 선수들이 김성근 감독에게 샴페인을 쏟아붓고 있다.

  ―3차전 때의 빈볼싸움이 SK 우승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플레이오프 때부터
한국시리즈
1·2차전까지 두산의
젊은 선수들이
신들린 듯 야구를 했어요.
 4번 타자
김동주나 베테랑 안경현,
 홍성흔이 뒤에
서 후배들을 받쳐 주니 「
5연 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이어 갔던
 것이죠.
그런데 3차전 빈볼싸움에서
김동주와
리오스가 심하게
흥분했어요.
 
빈볼싸움 전까지 두산의 이종욱, 김현수,
고영민이 시즌 때처럼 편하게 경기를
했었는데 고참 선배들이 크게 흥분한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그러면서
두산 젊은 선수들의 氣가 꺾인 것 같아요.
반대로 우리 팀 선수들의 氣는 살아나고,
 집중력이 향상된 것 같습니다』
 
  ―당시 두산 쪽에서 「SK가 고의적으로 빈볼을 많이 던진다」고 문제를 제기했죠.
 
  『1·2차전에서 투수들에게 「몸쪽 공을 많이 던지라」고 주문한 바람에 사구가 7개나 났습니다.
 고의성은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데 3차전이 끝나고 두산에서 `「그렇게까지 해서 이기고
싶냐」고 인터뷰를 했어요.
 
  두산 선수들은 발이 빠른 장점을 살리기 위해 어떻게든 출루해야겠다는 의욕이
 대단했어요. 우리 투수로서는 까다로운 볼을 선택할 수밖에 없죠. 두산이 흥분할수록
우리는 더 침착해졌어요. 그러면서 자연히 경기 흐름이 우리 쪽으로 넘어온
것 같습니다』
 
  ―우승이 확정됐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정말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와 막내 동생에게 정말
고마웠습니다. 시즌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성수동 집에서 인천까지 밥을
지어 날랐거든요. 항상 아버지와 SK를 위해서 기도해 줬습니다』
 
  ―어린 시절에 봤던 아버지 모습은 어땠어요.
 
  『말이 없으셨어요. 집에 오시면 아버지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어머니가 늘
「아버지는 밖에서 고생하시고 들어오니까, 집에서 편하게 쉬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한다」
고 말씀하셨어요. 올해 처음으로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것 같습니다』
 
  ―일본어는 아버지께 배웠나요.
 
  『아버지가 집에서 한국말로도 말을 안 하시는데 어떻게 일본어를 배웠겠습니까.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LG에 입사했을 때 6개월 동안 학원 다니면서 공부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일본 전지훈련 갈 때마다 조금씩 사용하면서 늘었습니다』
 
  ―앞으로 바람은.
 
  『시즌 초반에 아버지께서 몸이 몇 번 안 좋으셨어요. 한번은 밥숟가락을 못 들을 정도로
왼쪽 팔꿈치에 이상이 왔었어요. 왼손잡이인 아버지가 왼손으로 사인을 못 할
 정도였습니다.
 
  시즌 중간에 하루 동안 소리 소문 없이 일본에 가서 치료를 받고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늘 건강하신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한국시리즈 때는 신경성 대장염으로 벤치를
지키는 게 힘들었어요. 아버지가 감독직을 하시면서 아프지 않고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능력이 닿는 한 아버지 뒤에서 힘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다섯 번째 주례
 
해운대 앞의 한 식당에서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김성근 감독.

  서울 청담동의 리베라호텔에서
 잠깐 인터뷰를 하긴 했지만,
 月刊朝鮮에 실을 긴 기사를
 쓰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
月刊朝鮮을 위해 시간을 더 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金星根 감독은
『11월5일에 일본으로 간다. 그 전에
정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내 사정이 딱해 보였던지 평소 알고
지내는 아들 김정준 팀장이 『아버님이 토요일인 11월3일 부산에서 주례를 보신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주례를 끝낸 金감독을 붙들고 이야기를
 나눌 심산으로 김정준 팀장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해운대 앞 오션두 웨딩홀 20층에 도착한 것은 11월3일 오후 2시쯤이었다.
 金星根 감독은 주례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金감독은 『생에 다섯 번째 주례』라고 했다.
 
  한국시리즈 3차전이 열리던 10월25일 SK 톱타자 정근우(25)가 감독실을 노크했다.
11월3일 부산에서 결혼을 하는데 주례 확답을 받기 위해서였다. 정규시즌에서 3할대 타율을
유지했던 정근우는 한국시리즈 1·2차전 동안 안타가 없었다.
 
  金감독은 정근우에게 『주례를 서 줄 테니 마음 편하게 경기하라』고 말했다. 그날부터다.
정근우의 방망이는 불을 뿜었다. 6차전 때는 2점 홈런포를 쏘아 올리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金감독은 『주례 부탁이 들어오면 대개 거절하는데, 큰 시합을 앞두고 선수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며 『정근우가 감독의 약점을 잘 파고들었다』며 웃었다. 金감독은 『주례사 고민하는 게
 야구 경기 오더 짜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했다.
 
 
  숫자「8」
 
신혼시절의 김성근-오효순 부부.

  金감독의 주례사는 2007년 한 해 동안 인연이 닿았던 숫자 「8」에 관한 이야기였다.
 
  『신랑 정근우는 발이 빨라 야구할 때만 「스틸」을 하는 줄 알았는데 예쁜 신부감을 「스틸」하는 능력도 있었네요. 신랑의 선수 번호 「8」은 올 한 해 저와 큰 인연이 있었습니다. SK가 올 시즌 첫 승을 거둔 날이 4월28일이었고, 정규시즌 1위를 확정짓던 날이 9월28일이었습니다. 숫자 8은 중국에서는 「행운」을 뜻하고, 유교에서는 「지혜」를 뜻합니다. 이슬람에서는 「성스럽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두 사람이 결혼생활을 하면서 숫자 8처럼 균형 있게 밸런스를 이뤄 행복한 결혼생활을 만들어 가기 바랍니다. 8은 위아래 균형이 흔들리면 다른 한쪽으로 무게가 더 실리게
됩니다. 그래도 부부는 8처럼 항상 붙어 있어야 하는 운명이란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주례사가 끝나자 큰 박수가 터져나왔다. 金감독은 『주례사를 준비하면서 시간이 길어지면
 어쩌나, 혹시 발음을 못 알아 듣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고민했다』며 『박수소리에 긴장했던
 마음이 다 녹아내렸다』고 했다.
 
SK의 우승이 확정된 직후 SK 선수들이 구단주인 최태원 SK 회장을 헹가래 치고 있다.

  결혼식이 끝나고 金감독과 함께 식당으로 갔다.
 
  ―신랑·신부보다 주례가 더 긴장을 한 것 같습니다. 힘드셨죠.
 
  『야구할 때는 더그아웃에 앉아서 오더를 내리면 되는데 결혼식 주례는 한참을 서 있어야 하니 힘이 더 드네요. 다리가 아파서 혼이 났습니다. 일본 가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이제 다 매듭지은 것 같네요』
 
  金감독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한참을 일본어로 통화했다. 잠시 후 또 전화벨이 울린다. 이번에는 한국어로 통화했다. 전화를 끊더니 金감독은 『11월5일 비행기 스케줄을 다음날로 미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최태원 회장의 전화
 
SK 우승기념 티셔츠를 입은 최태원 회장.

  ―무슨 전화인가요.
 
  『SK 최태원 회장이 5일날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네요. 바쁘신 분께서 일부러 약속을 다 미루고
시간을 냈다는데, 제가 비행기 시간을 좀 늦춰야죠.
 한국시리즈 중에 최태원 회장님이 몇 번 응원을
오셨잖아요. 정말 힘이 되더라고요. 회사 차원에서
더 많이 도와주려고 하고. 이젠 한국 야구도 母기업에
도움 받는 차원을 벗어나서 구단 운영을 잘 해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독립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金감독은 일본 인맥이 넓다. 그는 『한국시리즈가
끝났으니까 해주는 얘기』라며 『일본의 친구가 전해
 준 정보로 두산전을 수월하게 풀어갈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一球二無
 
국가대표 시절의 김성근 감독.
뒷줄 왼쪽.

  『플레이오프 전에 일본에서 전화를 한 통 받았어요. 두산의 김동주가 일본 에이전트와 비밀리에 계약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두산 4번 타자 김동주가 올해 FA(자유계약 선수)되는 해잖아요. 일본으로 진출할 계획이라는 말이 많았는데, 그 전화를 받고 나니까 김동주의 행동을 더 유심히 관찰하게 되더라고요. 수비가 시즌 때 같지 않고, 타석에서 전같은 열의가 안 보였어요. 「마음이 떠났구나」 싶더라고요』
 
  金星根 감독은 식사할 틈이 없었다. 신랑·신부의 친인척, 친구들이 흰 종이를 가져와 사인해 달라며 줄 서서 기다렸다. 金감독은 종이에 「一球二無(일구이무)」라는 글귀를 적었다.
 
  ―「一球二無」가 무슨 뜻인가요.
 
  『일구이무요. 한 번의 공은 두 번 다시 없다. 즉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것이죠. 투수는 매 순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던지고, 타자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스윙을 하면, 9회말 투아웃에서도 기적은 일어나요. 제 야구인생의 철학입니다』
 
  김성근 감독, 김정준 팀장과 함께 김해공항으로 이동했다. 오후 7시20분 김포행 비행기를 탔고,
대화는 계속됐다.
 
  ―그동안 한국에서 고생하신 보람이 있으시죠.
 
  『저는 인생에 있어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승하고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하기도 했어요.
 
  「동지보다는 적이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우승하니까 저를 싫어했던 사람들까지 저를 인정을
해주더라고요. 젊었을 때 한국말이 짧아서 「반 쪽바리」라는 수모를 겪었어요. 마음 터놓고
대화할 사람이 많지 않았죠.
 
  그런데 이번에 우승을 하면서 「그래도 적보다 동지가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 혼자만의 힘으로 우승한 것이 아니었어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더 걱정해 주고,
 생각해 준 덕분이었어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원래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신가요.
 
  『원래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어요. 17세가 되던 해 재일교포 선수 출신으로
봉황기(1959년)에 참가하면서 처음 한국 땅을 밟았죠. 그리고 이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행을 택했어요. 동아대학교와 교통부에서 활동하다가, 1962년 신생 기업은행에 발탁돼
본격적으로 야구선수 생활을 시작했어요. 어려움이 많았죠.
 
  환경 낯설지, 한국말 서투르지… 적극적이고 활달했던 성격을 점점 잃어버리게 되더라고요.
일본에서 학교 행사 때마다 사회를 보는 게 저였어요. 공부하기 싫은 날 운동장에 나가면
 같은 반 친구들이 우르르 따라 나왔어요. 그때는 밝고 씩씩했던 것 같아요. 한국에 와서 한국말을
 못 하다 보니 말수가 적어졌고, 성격이 좀 바뀌었지요』
 
 
  혹독한 조련
 
롯데 마린스 감독으로 2006년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 보비 발렌타인.

  ―金감독이 1989년 1월 태평양 선수단을 이끌고 오대산
극기훈련을 가서 얼음 깨고 물속에 들어가게 했던 일이
전설처럼 전해져 옵니다.
 
  『타자는 하루에 2000~3000개씩 배팅 연습을 시켰고, 투수는
500개씩 던지게 했어요. 선수들의 장래가 내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힘든 훈련을 강행했던 것이죠. 제가 선수 시절에는 팔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이 심해도 감독 오더가 내려오면
무조건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꾹 참고 공을 던져야 했지요. 저는
 좀 무식하게 운동을 했지만, 선수들을 혹사시킨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합에 내보낼 선수들은 어떤 기준으로 고르고, 타순을
 정합니까.
 
  『정신력이 가장 중요하죠. 저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합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면, 더 노력하면 되잖아요. 정말 열의 있게 하는 선수에게
기회를 줍니다. 지바 「롯데 마린스」의 보비 발렌타인 감독에게서 많이 배웠습니다.
 
  이분은 선수의 컨디션을 중요시하고, 절대 선수 앞에서 험담을 안 합니다. 선수가 타석에서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결국 그 책임은 선수를 기용한 감독에게 있거든요. 선수를 탓하기 전에
그 선수를 가르친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는 게 진정한 감독이죠. 보비 발렌타인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에게 장난을 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선수들이 경기를
즐길 수 있도록, 그걸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성수동 자택에서
 
  비행기 안에서 金감독에게 『성수동 자택에
일본어로 된 책이 800권 가까이 있다는데 꼭 한번
보고 싶다』고 부탁을 했다. 『金감독의 선수 시절
사진도 보고 싶다』고 했다. 金감독은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내릴 때까지 아무런 「사인」을 주지
않았다.
 
  공항 대합실에서 金감독이 『집이 지저분할 텐데
 괜찮냐』고 물었다.
 
  11월3일 오후 9시쯤 서울 성동구 성수동 金감독의
자택에 도착했다. 金감독이 벨을 누르자 부인
오효순(61)씨가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사모님께서 내조를 잘 하셔서 金星根 감독이
밖에서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말하시던데요.
 
  『아니에요. 밖에서 고생하는 분이 힘드시지, 저는 그냥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예요.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가 서재입니다. 거실에 따뜻한 커피 준비했으니까 둘러보시고 나오세요』
 
  金감독의 부인은 하얀 피부에 선한 인상만큼이나 목소리가 고왔다. 간단한 다과를 준비한다며
금세 주방으로 갔다. 집 안에 화분이 가득했다.
 
  『집사람이 다 가꿔요. 나야 가꾸는 게 힘든지 잘 모르죠. 식탁 위에 있는 것은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보내온 선물이에요. 이번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더니 일본에서 선물로 보내 줬네요.
 집 안에 꽃과 식물이 있으니까 공기가 맑아서 좋아요』
 
  거실 한쪽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적힌 액자가 보였다.
 
  ―교회에 나가십니까.
 
  『아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나보고도 교회에 나오라고 하는데, 잘 안되네요』
 
  서재로 들어갔다. 수백 권의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1982년부터「야구일기」써
 
김성근 감독은 부인 오효순씨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사진 맨 오른쪽은 며느리이다.

  ―대부분 일본어로 된 책이군요.
 
  『한국에는 야구 관련 서적이 별로 없어요. 일본에서 사서 모았습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야구를 배웠어요. 틈나는 대로 책 읽고, 생각하고, 그걸 적용했죠』
 
  ―서재에서 50년 가까이 야구를 해온 발자취가 느껴집니다.
 
  『옛날부터 써왔던 야구일기, 노트예요. 1982년 프로야구가 처음 창단된 해에 기록했던 수첩이에요. 한번 보세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야구 일기를 썼어요. 야구 기록지 대신 나만의 기록법을 개발했지요. 타자들이 볼카운트 몇 대 몇에서 어떤 스윙을 하는지, 각 투수별로 자신 있는 구위는 무엇이고 위기의 상황에서 어떻게 승부를 보는지 자세히 적혀 있어요. 초록색 커버로 「OB」라고 적힌 노트를 보니까 세월이 느껴집니다』
 
  ―손으로 적는 게 귀찮을 때도 있을 것 같은데요.
 
  『컴퓨터로 자료를 뽑아서 보면 머릿속에 저장하기가 힘들어요. 손으로 기록해야 기억이 오래 남고, 급박한 상황에서 신속하게 정보를 꺼내 쓸 수 있어요. 그래서 손으로 쓰는 거죠』
 
  잠시 후 아내 오효순씨가 수정과에 잣을 띄워서 갖다 줬다.
 
  ―金감독이 『집에만 가면 어린아이가 된다』고 말씀하던데요.
 
  『집에서는 편하게 쉬셔야죠. 제가 뭘 해드리는 게 있나요. 더 잘 해드려야죠』
 
  ―교회를 열심히 다니신다고 들었어요.
 
  『제가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거든요.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남편을 위해
기도해 주시죠』
 
  잠시 후 막내딸이 앨범을 갖고 서재로 들어왔다. 앨범 속에서 「소년 김성근」,
「청년 김성근」, 그리고 「감독 김성근」을 만날 수 있었다.
 
 
  2008년 구상
 
  金星根 감독은 지난 9월28일
정규리그 1위를 확정짓던 날부터
 내년 시즌 준비에 들어갔다. 틈틈이 SK 2군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봤다. 金감독은
『11월8일부터 11일까지 일본에서
벌어지는 「코나미 컵」을 마친 후 본격적으로
다음 시즌 구상에 들어갈 생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2008년 구상은 대충 마무리된
 상태였다.
 
  『시즌 중간에 2군 선수를 데려다가
 경기에 쓰고 싶어도, 기량 차이가
크더라고요. 2군 선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어요. 2008년 SK는 1·2군 간의 무한경쟁을 할 겁니다. 구단에서 2군 선수 지원 비용으로
 5억원을 투자하겠다고 하니까, 일본 코치를 몇 명 뽑아서 혹독한 겨울훈련 체제로
들어갈 겁니다.
 
  2군 선수들의 기량을 끌어 올리는 게 한국 프로야구가 발전하는 길입니다.
2군 선수들에게도 희망이 있어야지요. 그래야 1군 선수들이 더 자극받고 열심히 할 테니까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2008년 시즌 개막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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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squeen
|
* 2007년 7월 31일자 경향신문

‘오늘은 단역, 내일은 주연’ 프로야구 2군의 하루
 
프로야구 1군이 영화의 주연이라면 2군은 단역이다. 온종일 땀을 쏟아 짧디 짧은 한 컷에 출연하면서도 내일의 스타를 꿈꾸며 사는 게 2군이다.

두산 2군 박종훈 감독이 지난 27일 SK전을 마친 뒤 선수들을 집합시켜 총평을 하고 있다. |두산베어스 제공


영화와 야구의 공통점은 일단 감독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 배역은 한정돼 있고 누구나 번듯한 역할을 맡고 싶어하지만, 실력이 없으면 기회도 없다. 단 한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폭염보다 뜨거운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땀의 현장, 두산의 2군 훈련장을 찾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지난 27일 오전 8시. 잠실구장 앞에서 두산 2군 선수 20여명이 코칭스태프와 함께 45인승 버스에 올랐다. 목적지는 경기 이천시 백사면의 베어스필드. 팀 숙소를 배정받지 못해 출퇴근을 감수하는 선수들이 버스에 탔다. 2군에서도 좀더 나은 실력을 보여야 숙소 생활을 할 수 있다.

덩치 큰 선수들의 무릎이 앞 좌석에 닿는 비좁은 버스. 1군 선수단의 25인승 버스가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라면 2군 버스는 ‘이코노미’다. 좌석을 업그레이드하려면 마일리지가 아닌 실력을 쌓아야 한다.

1시간후쯤 도착한 2군 훈련장. 숙소 멤버 15명은 이미 워밍업을 시작했다. 오전 6시30분에 일어나 조깅, 샤워, 식사를 마쳤다. 오전 9시, 모두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그라운드에 집합. 선수들의 얼굴이 중남미 용병처럼 시커멓다. 선크림을 잔뜩 바르며 늘 신경은 쓰는데도 하루종일 땡볕 아래 구르다보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이동하는 사이에 화장실을 찾아 2층 건물을 뒤졌으나 오직 ‘남자 화장실’뿐. 마치 군부대같다.

◇야구만 하는 게 아니다=오전 9시부터 시작한 훈련은 2시간 남짓 이어졌다. 훈련 외에 부수적인 일까지 선수들의 몫이다. 선수들은 코치를 따라 불펜과 그라운드로 나뉘었다. 타격훈련 할 때 제 차례가 아니면 공을 줍고, 장비를 날랐다.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에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데, 선수들은 “힘들다”는 말 한마디 안하고 씩씩하게 훈련에 임했다.

오전 11시30분 점심시간. 땡볕 아래서 뛰고 왔는데 식당의 점심 메뉴는 뜨거운 돌솥 김치 알밥이었다. 선수들은 “이열치열”이라며 밥 한톨 안남기고 싹싹 비웠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그라운드에 나와 경기 준비를 했다.

오후 1시 SK와의 2군 경기. 출전 선수 명단에서 빠진 몇몇이 기록원, 볼보이, 주전자 당번을 맡았다. 2층 기록실에 올라가는 보직은 그나마 나은 편. 경기 내내 공을 줍고 얼음물을 나르는 보조 요원은 금세 땀으로 뒤범벅이 됐다.

5회말이 끝나자 더그아웃에 있던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우르르 몰려나가 물을 뿌리고 땅을 골랐다. 심판 빼고는 모든 일을 선수들이 자체 해결한다.

그런데 딱 하나 해결 못하는 일이 있다. 관중이다. 두산 4번타자 이두환은 “몸이 힘든 건 차라리 낫다”면서 “홈런을 쳐도 아무 반응이 없을 땐 정말 서럽다”고 말했다.

관중이 없다 보니 더그아웃이 바로 관중석이다. 상대 공격때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외치면 선수들은 “그거야, 그거”라고 소리쳤다. 선풍기 하나 돌아가지 않는 더그아웃은 늘 찜질방처럼 후끈 달아올라 있다.

2시간 만에 경기가 끝났다. 박종훈 2군 감독은 “곧바로 훈련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선수들의 얼굴이 붉은 감자처럼 익었는데 강행군은 계속됐다. 그러나 불평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박감독은 말했다. “힘든 과정을 극복해야 1군에 가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체력·기술·정신력, 이 3박자를 모두 갖춰야 2군에서 ‘하산’할 수 있다”고.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오후 4시쯤 훈련이 끝났다. 샤워를 마친 선수들이 세탁실로 왔다. 노란 바구니에 빨래를 구분해 담는 그들. 2군 안에서도 1·2군이 있다. 2군의 2군은 매일 직접 빨래를 해야 한다. 고단한 빨래도 내일의 주전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준비운동이다.

오후 6시 저녁식사 시간. 모처럼 소고기 반찬이 나왔다. 고기를 열심히 굽는데 주방장 아저씨가 나와서 한마디했다.

지난 27일 이천 두산 2군경기장 기록실에서 김강률과 정진수가 기록을 하고 있다. 김강률은 경기후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동료들과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일과를 마친 선수는 가방을 챙겨 숙소로 들어가고 있다. |두산베어스 제공


“현수는 훈련도 무섭게 했지만, 밥도 두세그릇씩 뚝딱 해치웠어. 밥이 보약이거든. 잘 먹고 체력을 쌓아야 현수처럼 1군으로 갈 수 있는 거야.”

최근 1군 주전으로 자리잡은 김현수 얘기였다. 아저씨의 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젓가락 경쟁이 붙었다. 저마다 “나도 밥 잘먹고 현수형처럼 1군에 올라갈거야”라면서.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1군 무대의 주인공이 될거라고 다짐하면서.

〈이천|임현주기자 korear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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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4일자 경향신문

두산 고영민 “이젠 안타 못쳐도 목욕탕 안바꿔”
 
두산 김경문 감독은 요즘 이 선수 때문에 웃는다. “순발력 좋고 발이 빨라 수비를 잘 하는데 팀이 어려울 때는 한 방씩 터뜨려주기까지 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김광수 수석코치도 “스피드가 남다르고 경기를 보는 눈이 두 수는 앞서 있다”고 거든다.

공·수 양면에서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쳐 두산의 2위 상승세를 이끈 숨은 주역 ‘2익수’로 통하는 2루수 고영민(23)이다.

무명의 설움을 딛고 붙박이 1군 주전으로 도약해 올 시즌 전 경기(83경기) 출장 중인 그는 요즘 잠실구장에 내걸리는 ‘고제트 고영민 파이팅’ 플래카드를 보면서 더욱 힘을 낸다. 그에게도 어엿한 고정 팬이 생긴 것이다.

‘고영민+가제트’인 ‘고제트’는 그가 만화 주인공 가제트 형사처럼 팔 다리를 쭉쭉 뻗어 수비하는 모습을 빗대서 붙여진 별명이다. 난생처음 프로야구 올스타(감독 추천 선수)로 뽑힌 데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예비 엔트리에도 발탁되면서 전성기를 맞이한 그를 지난 22일 잠실구장에서 만났다.

“어렵고 힘겨웠던 시절, 저에게 용기를 주셨던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며 1군 그라운드를 밟고 있어요.”

지난 14일 SK전 만루 홈런 등 6·7월에만 홈런 8발을 몰아치고, 20일에는 짜릿한 끝내기 안타를 터뜨려 시쳇말로 요즘 방방 뜨고 있는 그는 지나간 시절 얘기부터 꺼냈다.

성남고 졸업 후 2002년 입단한 프로 6년차인 그는 데뷔 후 4년 동안 2군에서 ‘눈물 젖은 빵’을 씹었다. 한여름 땡볕 아래서 훈련하느라 얼굴은 새까맣게 타들어가는데, 텅 빈 관중석을 보면 외롭고 쓸쓸했다.

고영민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열심히 하는데도 2군 생활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면서 “야구를 그만두려고 마음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때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힘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울며 떼쓰는 아들에게 글러브를 처음 사주신 어머니였다. “네가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했는지 돌아봐라. 그게 아니면 포기할 자격이 없다….”

2005년 8월. 처음으로 1군 엔트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세상을 손에 쥔 것 같은 기쁨이 밀려왔다. 들뜬 마음으로 2군의 마지막 경기를 하는데, 그날 베이스를 잘못 밟아 양쪽 발목 인대가 늘어났다. 부상으로 시즌 마감. ‘난 왜 이리도 운이 없는 걸까.’

2006년. 다시 찾아온 기회를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졌다. 1군 116경기 출전에 타율 2할7푼, 홈런 2개, 도루 14개. 김경문 감독은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그해 겨울 전지훈련에서 새벽까지 스윙 연습을 하며 땀으로 샤워를 했다. “너, 이것밖에 안되냐”고 자신을 다그치며 훈련했다.

고영민은 “야구를 못할 때는 징크스가 있었다”고 말했다. 경기 전에 목욕탕에 다녀와야 안타가 나올 것 같았고, 안타를 못 치면 다니던 목욕탕을 바꿨다고 했다. 지금은 아니다. “징크스를 탓하지 않는 게 진짜 프로라는 걸 배웠다”고 했다.

지난해 2100만원이던 연봉이 올해는 4200만원. 딱 곱절 뛰었다. 이제는 다달이 부모님에게 용돈도 부쳐드리고 저축도 한다. 야구 입문 15년 만에 처음으로 보람을 느낀다.

고영민은 요즘 한 가지 찔리는 구석이 있다. 삼진이 무려 73개. 거포 심정수(삼성)보다 1개 많은 현재 ‘삼진왕’이다. 그는 “안타를 꼭 치고 싶은 욕심에 헛방망이질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머쓱해 하면서도 “부끄럽지만 주눅들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러 2할7푼 타율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 고영민은누구?

▲생년월일=1984년 2월8일 ▲우투우타 ▲체격=1m82, 73㎏ ▲혈액형=AB ▲출신학교=도신초-영남중-성남고 ▲가족관계=1남2녀 중 둘째 ▲프로입단=2002년 두산 2차 1순위

〈임현주기자 korear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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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9일자 경향신문 기사 입니다.

LG톱타자 이대형 도루1위 질주… ‘대도’ 노리는 슈퍼소닉
 ‘슈퍼소닉.’ 프로야구 LG의 날쌘돌이 이대형(24)의 별명이다.

바람, 총알보다 빠른 초음속으로 다이아몬드를 휘저어 시즌 중반 도루 1위를 질주 중인 그를 지난 27일 잠실구장에서 만났다. 팔다리에 빨갛고 파랗게 터지고 멍든 자국. 이대형은 “영광의 상처”라며 환하게 웃었다. 매일 슬라이딩에 다치고 찢어져도, 일단 1루에 나가기만 하면 “그라운드를 훔치고 싶은 욕망이 솟아오른다”는 이대형.

프로 데뷔 후 5년 만에 붙박이 주전 톱타자로 발돋움해 3할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는 그는 올 시즌 LG 신바람 상승세의 당당한 선봉이다.

#꼬마 육상선수, 야구에 눈 뜨다

100m를 11초에 주파하는 이대형은 어린 시절 육상선수였다. 달리기라면 누구보다 자신있어 초등학교때 육상대회에는 빠짐없이 출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TV로 야구 생중계를 보다 한 선수에게 시선이 꽂혔다. 해태 타이거즈 이종범이었다. 바람처럼 달리고 짜릿한 안타를 뽑아내는 플레이에 11살 꼬마는 마음을 뺏겼다.

“야구가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살던 충남 대천에는 야구부 있는 초등학교가 없는 게 문제였어요.”

매일 밤낮으로 부모님을 붙잡고 광주로 전학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그렇게 원한다면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했던 아버지가 어느날 광주로 근무지를 옮겼다. 5학년때였다. 대천에는 왼손잡이 글러브가 없어 제대로 야구 한번 못했는데 광주에는 없는 게 없었다.

#고교 4학년, 투수를 포기하다

중·고교때 이대형은 투수였다. 그런데 변변한 성적을 못 냈다. 1·2학년때 선배들에게 밀려 벤치만 지키다 3학년이 됐는데도 신통찮긴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졸업하면 ‘갈 곳이 없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녔다.

“막다른 골목길에 다다른 기분이었어요. 고민 끝에 ‘빠른 발을 살려야겠다’고 마음먹고 투수를 포기했어요.”

투수 대신 중견수로 자리잡으면 적어도 프로 2군에는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야구를 다시 시작했다. 투수때는 선배 그늘에 가려 제대로 못 뛰었는데 중견수가 되니 매일 훈련하며 빠짐없이 경기에 나갈 수 있었다. 실력도 늘고 자신감도 얻었다. 중견수가 되고나서 처음으로 전국대회 우승을 맛봤다. 그리고 LG로부터 2차 지명을 받았다. 유급을 하면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았다.

#소심한 O형, 김재박 감독을 만나다

혈액형이 O형인데 지독히 내성적이다. 미니홈피에 비방 글이 올라오면 크게 상처를 받았고 결국 홈피를 없앴다. 소심한 성격을 감추려고 겉으로 잘 웃고 소탈한 척했다. 그러다가 김재박 감독을 만났다. 김감독은 이대형에게 “전쟁터에서 총들고 웃는 사람은 없다”며 “투수와의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강한 눈빛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감독은 전지훈련 중에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대형에게 육두문자를 큰 소리로 외쳐보라고 시켰다. 이대형은 김감독의 마음을 읽었다.

“이젠 나름대로 카리스마를 갖게 됐어요(웃음). 그라운드에서 집중력이 더 높아진 것 같습니다. 전보다 방망이도 더 잘 터지고요.”

#프로 5년차, 도루왕 향해 ‘훔친다’

이대형은 ‘듀라셀’ 배터리 광고 속 주인공 ‘토끼’를 닮았다. 빠른 발과 지칠줄 모르는 체력은 둘째가라면 서럽다. 이대형의 배터리 충전은 어머니가 지어주신 가물치 보약이다. 매일 아침·저녁 가물치를 먹고 힘을 낸다.

28일 현재 도루 25개를 성공해 이 부문 단독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대형의 ‘올 시즌 최고’ 도전 뒤에는 숱한 상처가 가려져 있다. 중견수가 되고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새 살이 돋아본 적 없는 오른쪽 무릎. 슬라이딩하다 까진 팔·다리 상처는 이제 감각을 잃었다. 그래도 좋다. 몸이 부러지고 으스러지지 않는 한 계속 베이스를 훔치고 싶단다. 얼마전에는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예비 엔트리에 뽑히는 기쁨도 누렸다.

“국가대표가 됐으니 더욱 열심히 뛰어야죠. 도루왕이 되는 게 목표예요. 타율도 3할대를 유지하면 더 좋겠지요. 물론 부상 없이 주전을 지키는 건 기본이고요.”

〈글 임현주·사진 김문석기자 korearu@kyunghyang.com〉

■이대형은

▲생년월일=1983년 7월19일

▲체격=1m84·78㎏

▲학력=광주 서림초-무등중-광주일고

▲2003년 LG 입단

▲수상=대통령배·청룡기·황금사자기 도루왕(2002년)

▲올시즌(2007년) 성적(27일 현재)=타율 3할(13위), 70안타(공동 6위), 38득점(공동 4위), 25도루(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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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MBC 드라마 '내조의 여왕'  촬영장에서 카메오로 출연한 표도르 에밀리아넨코를 만났다. 모든 스텝들이 박수치고,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자 표도르는 상당히 긴장한 것 같았다.

"Федор ! Скажите пожалуиста что ни-будь."
"표도르! 한말씀만 해주세요"라는 첫 마디에 "무슨 말을 해줄까요?"라며
미소지었던 표도르.  ^^;;





내조의 여왕의 오지호(달수 역)와 멋진 연기를 마무리한 표도르. 다음번 방한 때는 꼭 한번 단독 인터뷰 해주겠다는 약속 지켜주시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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