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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에 공룡능선이 있다면 북한산에는    의상능선이 있다.

의상ㅡ 용혈ㅡ 용출ㅡ 증취ㅡ 나월ㅡ 나한ㅡ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코스로 산을 타다보면 자연의 웅장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의상능선을 넘으면서 10년 전 처음 의상능선을
마주했던 때가 떠올랐다.

바위를 오를 때 마치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있지만
정신 바짝 차리고 찬찬히 한 발씩
내딛으면 금새 봉우리 하나를 넘고
또 넘고..

의상봉을 지나면 또 더 높은 용혈봉이
나타나고, 이제 좀 평탄한가 싶음 산 아래로 내려갔다가 더 가파른 용출봉으로...

나는 보통 대남문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좋아하는데. 이 때 돌계단으로 쉼없이 내려오다보면. 가파른 언덕을 넘어 능선을 타고  올랐던 그 순간이 다시 그리워진다.

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한 없이 작은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이 끊임 없이 반복되는 능선 처럼 우리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기에...


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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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유학시절, 러시아 분야에선 둘째 가라면 서러운 실력자가 되고 싶다며 만든 아이디.

moscow + queen = mosqueen.

좀 유치해보이긴 하지만 애정 아이디입니다. ^^;; 실력으로 모스크바의 퀸이 되고 싶었던 바람이 담겨있는데요. 신문기자 시절엔 기사마다 바이라인이 달리기 때문에 korea +Russia = Korearu를 주로 사용했고

MBC 기자가 된 후엔 mosqueen@mbc.co.kr 주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전문가, 러시아 전문 기자를 꿈꾸던 mosqueen이 왜 홍콩에 있냐고요?

 

2014년 2월 소치 동계올림픽 취재 이후 ~

 

 

흑해 연안의 좋은 기운을 받아~

 

mosqueen도 아닌, MBC 기자도 아닌, 한 아이의 엄마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기획취재부에서 일할 때 '미숙아'관련 취재를 하다 인터뷰 섭외에 실패해 방송을 못했던 경험이 있었는데요. '머리'로 이해했던 일들을 조산으로 직접 겪어보니 미숙아 부모들의 심정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경/단/녀는 될 수 없었기에 출산 후 50일 만에 보도국 국제부로 복귀해 업무를 이어갔는데요.

 

갑자기 남편이 홍콩 주재원으로 발령나서 이산가족으로 아이를 혼자 키우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8월 육아휴직을 하고 이곳, 홍콩으로 왔습니다.

 

저는 전세계에서 모스크바만 물가가 비싼 곳인줄 알았는데. 홍콩은 집값도 장난이 아니고 물가도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라고는 월 80만원에 고용할 수 있는 필리핀 입주 도우미 뿐이었습니다.

 

출국 전 회사 동료들이 "필리핀 아줌마 잘 골라서 편하게 지내다 오라"고 조언을 해줬는데. 막상 홍콩에 와보니 집이 너무 좁아서 필리핀 아줌마를 고용해도 재울 공간이 없더라고요. OMG

 

결국 헬퍼 찬스는 포기하고, 해외 독박육아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직접 키워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품앗이 육아, 공동육아라는 것을 시작했지요.

 

 

홍콩 구룡 지역에 마음 맞는 엄마들을 모아서 엄마들이 아이를 직접 가르쳤습니다. 내 아이를 위해 수업을 준비하고, 엄마와 아이들을 위한 간식도 직접 준비하면서 그렇게 품앗이 육아를 6개월 정도 했습니다.

 

(사진/ SW맘표 간식)

가끔은 엄마와 아이들의 기분 전환을 위해 디즈니랜드에 가서 공연을 보기도 했습니다.

 

 

워킹맘이 언제 또 '엄마'로 최선을 다해보겠냐며 오롯이 아이를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웃고, 울면서 보냈던 시간들을 통해 아이가 자라는 만큼 엄마도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제 얼마 후면 저는 다시 직장으로 복귀해 제 일을 시작하겠지요.

 

 

홍콩은 야경이 참 예쁩니다. 모스크바 야경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지요.

 

젊은 날, 이곳에 여행도 왔었고.

2014년 소치 출장 이후 영화담당 기자로 홍콩 필름마켓 취재도 왔었는데요.

 

 

(사진/오른쪽부터 SBS 최호원 현 도쿄특파원, YTN 김선희 부장, MBC 임현주 기자 롯데엔터테인먼트 관계자 등)

 

이곳에 살게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ㅠㅠ

 

 

지난해 국경절(10월 1일)과, 지난 구정에 불꽃놀이를 보면서 홍콩 생활을 '여행객'의 입장이 아닌 '주민' 비스무리한 심정으로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홍콩은 참 습한 지역입니다. 한 겨울에도 에어컨을 돌려야 습기를 제거할 수 있는데요. (모든 아파트에 난방시설이 없습니다. ㅠㅠ) 추운 나라에 살다 4계절이 아름다운 우리나라에 적응했더니 다시 습한 나라에 와있네요.

 

남편을 위해 난생 처음 갈비탕도 끓여보고, 유모차 없이 혼자 외출해본 것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에 충실했습니다.

 

이제 곧 직장에 복귀하면 저는 또 묵묵히 제 일을 감당해나가겠죠.

 

블로그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항상 마음 한 구석이 찔렸는데요. 이렇게나마 소식을 전합니다.

 

워킹맘 mosqueen! 안녕합니다. ^^;;   

다시 현장에서 임현주 기자로 인사드릴 때까지 모두 행복하세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

 

 

 

 

 

 

 

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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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블로그 쥔장 임현줍니다.
제가 9월 19일부터 MBC 문화방송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2006년 9월 경향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한국일보, 중앙일보를 거쳐 MBC로 왔습니다.
기자경력 5년동안 참 많은 이동이 있었는데요. 짧은 시간동안 너무 많은 직장을
옮긴 게 부담되지만, 다른 한편으론 여러번 이직 제의를 받을 만큼 열심히 살았던 삶의 흔적이라
생각합니다.

MBC는 사실 10년전 저에게 기자의 꿈을 안겨준 회사입니다.
모스크바 유학시절 MBC 통신원을 하면서 기자란 직업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 1, 2위를 다투는 모스크바에 살면서 매번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아직도 러시아는 빵 사려고 사람들이 줄 서있냐?. 마피아 때문에 위험하진 않냐"는
질문을 받으면서 언론이 변화된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해 사람들이 편견을 갖고 변화된
러시아를 보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들어와 언론사 입사시험 준비하면서는 MBC 백분토론 시민논객, MBC 라디오 시선집중 작가 등을
하면서 기자가 되기위해 작은 경험들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MBC 입사시험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2006년 9월 경향신문에 입사해서 좋은 선배들 밑 에서 일을 배우며 기자로 조금씩 성장해 나갔습니다.
2010년 1월 한국일보, 2011년 중앙일보를 거쳐 MBC로 왔습니다. 

방송 경험은 없지만 새로운 다짐과 각오로 앞으로도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MBC에서 열심히 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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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자로 인사가 났습니다.
국제부로 발령받았습니다.
기자생활 5년동안
사회부(경찰, 검찰), 산업부 등
다양한 부서를 경험했습니다.
기자들은 흔히 인사이동이 있을 때마다
직장을 옮기는것 만큼의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는데요.
변화 앞에 두려하기보다는
노력으로 한걸음 내딛는
기자가 되겠습니다.
러시아 관련 좋은 기사도 많이 발굴할게요.
감사합니다.

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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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텍스트.

임현주 한국일보 기자
mosqueen@hanmail.net

-“XXX당 OOO의원입니다. 어떤 정치적인 의도로 그런 기사를 쓰셨습니까”
=“정치적 의도라뇨? 제가 정치인입니까. 취재과정에서 알게 된 것을 기사화한 것뿐입니다.”
-“기자님이 아니라면 데스크의 의도가 있었겠죠. 그럼 인터넷만이라도 기사를 바꿔주십쇼.”
=“그렇게 못하겠는데요.”
-“그럼 제가 소송을 진행하려 하는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뚝.(신호음 끊김)

지난 여름, 법조팀으로 발령 받고 서초동에 오자마자 ‘민간인 사찰’을 취재했다.
검사들은 사실관계를 직접적으로 확인해주지 않기 때문에 “확인해줄 수 없다”는 말도 뉘앙스에 따라 답이 ‘Yes or no’ 갈라져, 가능하면 팩트 확인은 직접 찾아가서 하라고 배웠다. 서울중앙지검에서 취재했던 첫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크렘린’. 검찰 관계자는 모두 성벽으로 둘러싸여 속을 알 수 없는 크렘린 같았다. 처음부터 검찰 내부 취재가 힘들기 때문에 열심히 외곽취재를 해서 팩트를 물어오면, 가뭄에 콩 나듯 겨우 한두 개쯤 확인했다.

그렇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검찰 취재에 적응해나갈 무렵, 저녁 뉴스에 “현역 국회의원과 그 부인도 사찰 대상이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흠, 오자마자 ‘물(낙종)’을 먹었으니, ‘반까이(만회)’를 해야 하는데, 법조 경험이 없다 보니 먹성 좋은 돼지마냥 이것저것 물어보며 찾아다녔다.

불법 사찰은 분명 잘못된 것인데,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왜 현역 의원과 그 부인을 사찰했는지 그 배경이 궁금했다. 취재 과정에서 경찰과 검찰이 같은 사안, 같은 혐의를 놓고 동일 인물 2명을 피해자와 피의자 정 반대로 바꿔 놓고 수사했던 사실을 확인하고는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A의원 부인 소송 사건 당시 외압 행사 의혹”(한국일보 7월 24일자 종합5면)
모든 언론 보도 방향은 민간인 사찰이 얼마나 광범위한 대상으로 이뤄졌느냐에 있었는데, 한국일보는 그 해당 의원과 관련해 사찰했던 내용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A의원은 보도 즉시 “인터넷에 기사를 내려달라”고 연락을 했고, 취재한 입장에선 “근거가 있으므로 내용을 바꾸거나 내릴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서로 불쾌한 감정만 드러내며 전화를 끊었다.

이제 막 법조를 출입하게 된 5년차 기자는 어느 4선 의원으로부터 “소송 걸겠다”며 받은 전화가 “기사 안 내려!”라는 압박으로 들렸다. 일반인이 4선 의원을 상대로 싸운다면? 글쎄… 그 부담을 견뎌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신청했고, 나는 취재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언론중재위에 제출할 자료를 준비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겉으론 담담한 척 하면서도 속으론 “나중에 소송까지 가면 진짜 피곤해질 텐데…”라며 가슴 졸이던 ‘소심한 기자’였다.

며칠 후 언론중재위에 갔다. 작은 법정처럼 서울중앙지법에서 파견 나온 모 부장판사를 포함해 총 6분이 계셨다. 준비한 자료에 형광펜으로 밑줄 그은 부분을 근거 자료로 제출하자, 한 분께서 A의원 측 변호사에게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정정보도를 요청했나요, (A의원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리고 한국일보 법조팀장에게는 “취재 꼼꼼하게 잘했다”며 격려를 했다. 팀장은 프레스센터를 나오면서 “언론중재위에 몇 번을 왔지만, 안 깨지고 칭찬 듣긴 오늘이 처음이다”고 했다.

검찰이 공직윤리지원관실 이인규, 김충곤, 원충연 씨 등을 기소할 때쯤 서울중앙지법으로 자리를 옮겼다. 매주 화·목요일마다 집중심리가 열렸고, 틈 날 때마다 법정에 들어갔다. 기자들의 관심사는 ‘비선라인이 밝혀지느냐’였지만, 검찰이 기소한 혐의 내에서만 재판이 이뤄지니 그동안 보도된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 전개가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공직윤리지원관실 내부 라인과 갈등에 대해 기사를 썼는데 구속 기소된 B씨 부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당신이 내 남편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니 가만있지 않겠다”며 “남편이 억울하게 구속된 것도 화가 나 죽겠는데, 당신 기사 때문에 얼마나 열 받은 줄 아냐”며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했다. 결국 B씨는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취재도 힘든데, 어렵게 기사 하나 쓰면 “소송 건다, 가만 안 있겠다”며 소리 지르는 전화를 받기가 일쑤였다. 겉으론 덤덤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야근하고 집에 들어갈 때면 ‘누구 뒤따라오면서 해코지 하는 사람 없나’ 돌아보게 됐다.

이제 겨우 법조를 출입한 지 6개월. 짧은 시간 동안 지검, 지법을 거쳐 대검찰청을 출입하고 있다. 서초동은 학연·지연이 중요한 곳인데, 독특한 이력 탓에 “선배님~”하면서 넉살 좋게 찾아가 인사할 사람도 없다 보니, 법무부·대검 주최 등산이나 외부 행사는 적극 찾아 다녔다. 발품 팔고 눈도장 찍으며, 학연·지연만큼이나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가며, 아직도 ‘적응 중’에 있다.

서초동에서 검찰·법원이 돌아가는 시스템을 보며 ‘법 앞에 평등’이 아닌 ‘무전유죄, 유전무죄’인 세상인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누군가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밤늦게까지 땀 흘리는 판사, 검사, 기자들을 보며 희망을 가져본다.

한 달 전쯤, 친구가 “재밌다”며 추천해준 영화 ‘부당거래’를 보면서도 단순히 ‘재미’가 아닌 ‘씁쓸한’ 그 무언가를 느꼈던 이유도 비슷하다.
관객들이‘장인 잘 둔’스폰서 검사와 ‘배우(가상의 범죄자)를 쓴’ 광수대 에이스 팀장,‘접대와 로비를 받으며 기사를 쓴’구악 기자를 보며 웃을 때, 나는 그 어떤 외압에도 흔들림 없이 소신껏 일하고자 하는 서초동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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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6일 오전 10시.
서울 고등법원 312호. 1980년 '진도 간첩단 사건'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말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한 어부의
아내가 법정에 섰습니다. 진도 간첩단 사건의 마지막 피고인이자 사형집행 된 고 김정인씨의 재심 선고날이었습니다.
30년전 갑작스레 남편을 떠나보낸 한화자(67)씨는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하여 조용히 법정으로 올라왔습니다

80년 진도 임해면 어촌 마을에 살던 일가족이 6ㆍ25때 월북한 고 김정인씨의 외삼촌을 10년간 간첩 활동했다는 혐의로 중형 선고받은 사건입니다. 무기징역 받은 다른 피고인들은 지난해 1월 재심서 무죄 선고 받았고, 김정인씨 재심 선고만 남았습니다. 

담당 부장판사가 말을 합니다. 
"1980년 8월, 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체 김씨를 불러다 고문수사한 사실이 인정되고, 피고인은 일관되게 심한 고문으로 자백을 했다고 증언을 했습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문을 받았고, 허위로 자백했고, 간첩죄가 성립되어 사형선고가 집행됐습니다. 무고한 생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중략)
다시는 이같은 사건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판결로 인하여 사법부의 그늘진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조금이도 바로 세울수 있다는 것에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고 싶습니다. 피고인은 무죄임을 판결합니다."

한화자씨의 어깨가 흔들렸고, 이 판결을 지켜보던 한씨의 딸들도 흐느꼈습니다.
법정은 숙연해졌고, 부장 판사가 억울한 한씨를 위해 편지를 꺼내 읽었습니다.

"30년전 남편을 잃고 자녀들을 혼자서 키우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습니가.그래도 자녀들을 너무나 훌륭하게 키워오셨네요.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사형시킨) 이런 판결을 한 대한민국을 사랑하시겠습니까?
그동안 수고하셨고, 너무나 고생하셨습니다."

한화자씨는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그녀의 눈물을 보면서 
판사도 울고, 가족도 울고, 또 울었습니다.

법정에서 흐느끼는 한화자씨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30년간 남편 없이 5남매를 키우며 힘들게 살아온 그분의 눈물에는
인생의 아픔과 기쁨, 슬픔과 고통 등 많은 사연들이 녹아져내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한화자씨가 조용히 말을 합니다.
"큰 아들 고등학교 1학년이고 막내는 3살때 이 일을 당했어요. 내 몸을 녹여서 자식을 키웠고, 내 고통은 하나님께서 아셨지요. 정말 24시간 돈버느라, 돈벌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서 견뎌왔어요. 지난 30년이 세월이 너무너무 기가 막히죠. 
그래도 내 자식들의 억울함, 남편의 억울함은 벗어주고 싶었어요. 항상 기도했습니다. 남편이 이 혐의에서 벗어나 자식들 앞길을 막지 않도록, 자녀들 앞날을 열어달라고. 너무 기쁘고, 한편으로는 어찌 해야할 바를 모르겠네요.
그 사람도 천국에서 기뻐 뛰겠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동안 '진도 간첩사건'을 사회면 기사로 접할 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죄없는 사람들을 고문하며 혐의를 뒤집어 씌운 '대한민국'을, 그 대한민국을 사랑할 수 있겠냐는 부장판사의 한마디가 
가슴을 울립니다.

오늘은 서초동에 비도 오고, 마음이 짠해서 두서없이 글을 적어봤습니다.
진도간첩사건과 관련해서 '서울신문' 정은주 선배가 정리한 글을 추천합니다.

http://ejung.blog.seoul.co.kr/165

저는 오늘 재심 판결만 지켜봤을 뿐입니다. 정은주선배 글을 읽어보니 오늘 아침에 흐느꼈던 그분의 눈물이 더 깊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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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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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로 발령났습니다.
예전에 사회부에서 마지막으로 강남경찰서 출입하면서 강남, 수서, 송파, 서초 등을 챙겼는데
바로 그 라인에있는 서초동으로 왔습니다.
법조 기사는 항상 읽으면서도 '어렵다'고 생각됐는데, 이제 그 어려운 기사를 써야하네요.
좋은 단독기사 많이 취재하고 발굴해야하는데 얼마나 빨리 적응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다행히 서초동에서 옛날 경찰 출입 동기, 선후배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인데 잘 지내고 노력해야죠.
변화는 항상 사람을 성장하게 만들잖아요.
또 한번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같습니다.

파이팅!
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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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남아공 월드컵 취재팀 파견나와있습니다.
남아공 현장으로 날아간 것은 아니고요, 매일 회사로 출근해 월드컵 취재팀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중간에 차출됐어요.)
블로그 글 업데이트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 사과드리고요, 한국 경기가 끝나는 날까지
좋은 경험 쌓고 복귀해서 글 올릴게요.

감사합니다.
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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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임현주입니다. 2006년 경향신문에 입사할 당시 '아랑의 언론고시' 카페에 올린 글입니다. 당시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는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시고, 응원을 해주셨던 생각이 나는데요. 저 처럼 시행착오를 겪고 힘들어하며 고민하는 친구들이 제 글을 읽고 희망을 되찾아 뜻한바를 이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올린 글이었습니다. (당시 아랑 카페에서 조횟수, 댓글 장난 아니었습니다.ㅎㅎ)  
비오는 오늘, 제 블로그에 2006년 그 시절, 그 때, 그 마음을 기억하며 올려볼게요. *^^*


2년전의 나


 만으로 꼭 2년이 됐습니다. 정확히 2004년 9월 초에 스터디를 시작했습니다. 두꺼운 SPA를 사서 한숨만 푹 쉬던 기억이 납니다. 잠재적 실업자인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SPA를 챕터별로 나눴습니다. 남들은 분책해서 사용하던 데 저는 그 돈도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내가 볼 것인데, 예쁘게 나눈 들 무슨 소용 있나 싶어 문구용 칼로 챕터를 나눴습니다. 실력보다는 기자가되겠다는 의지만 앞서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몇 번의 스터디 실패


 처음 스터디원을 만났을 때 설렘이 가득했습니다. “이제 이 사람들과 함께 뜻을 향해 나가면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스터디원 중 경험이 많았던 한 사람이 “논술을 쓰는 수준이 너무 다르다”며 스터디 해체 선언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소위 언론고시를 준비한다는 이 바닥에서는 기본적인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스터디 하나 제대로 구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한번은 ‘논술’만 따로 하는 스터디를 구했습니다. 모 대학 국문과 학생들이 중심이 됐던 스터디인데, 첫날 제 글을 보고 첨삭을 해주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른 길을 찾아 보시죠”라는 조언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3개월 동안 꿋꿋하게 모임에 나갔고, 첨삭시간에 내가 다른 사람의 글을 첨삭해 줄 순 없었어도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받아 적고 집에 와서 여러 번 옮겨 쓰기를 해봤습니다. 그날 가장 잘 쓴 글을 뽑아서 베껴 써보고, 또 제 글의 문제점을 고쳐나가도록 노력했죠. (한겨레 신문사 한효석씨의 ‘이렇게 해야 바로쓴다’는 책에 도움이 컸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스터디마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스터디를 직접 만드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4학년 졸업을 앞둔 학생과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스터디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아랑카페에 냈습니다. 그때 여러 명의 지원자들의 스터디 지원서를 받으면서 5명 정도 뽑았습니다. 감사하게도 모두들 ‘의지와 열정’ 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실하게 맡은 과제를 충실히 해왔고, 철저하게 벌금제도를 유지하면서 긴장의 끊을 놓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이 스터디가 자리를 잡을 때 쯤 ‘논작’스터디만 하나를 더 구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사람들과 귀한 인연을 맺어 공부를 했습니다.


방송 아카데미 중도 하차


 졸업 후 기자시험을 준비하다보니 어딘가에 적을 두지 않아 불안한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모 방송사 아카데미를 등록해 ‘방송기자’수업을 듣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름대로 서류전형과 면접을 통해서 들어갔던 아카데미였는데, 시스템과 체계가 전혀 잡혀져있지 않은 것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그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수업을 들은 지 3일 만에 바로 ‘환불’신청을 했습니다. 정말 웬만한 아카데미보다 제대로 된 스터디 하나가 훨씬 낫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나왔습니다.


2005년 나

 언론사 시험준비만 하던 저의 하루 일과는 이러했습니다. 아침 5시30분-6시 기상. 책가방을 메고 학원을 향해 7시에 CNN청취를 한 시간 들은 후 8시부터 신문을 보며 상식공부를 했고, 오후에는 좋은 글을 찾아서 옮겨 쓰는 것을 했습니다. 스터디는 일주일에 2번정도 했기 때문에, 스터디 과제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금방 갔죠.

 실력은 없었지만, 노력은 했습니다. 그 노력을 인정한 몇몇 사람들이 좋은 책을 추천해주고, 조언을 많이 해줬습니다.  제 장점 중 하나라면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정말 막막할 때 항상 주변의 선배나 멘토를 찾습니다. 내 공부 방법은 이러이러한데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능률은 안 오르는 것 같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 달라. 정말 구체적으로 묻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도 안타까운 마음에 조언을 해줍니다. 자신의 성공담, 주변의 사례를 이야기 하면서 말이지요.

 2005년 동안 저는 총 6번의 시험을 봤고, 6번 모두 필기에서 낙마했습니다. 당시 저는 ‘내가 가고 싶은 회사가 아니면 시험을 안본다’는 소신을 갖고 방송국 2곳, 신문사3곳, 인터넷신문 1곳을 시험 봤습니다. 공고가 난다고 무조건 지원하지 않았던 이유는 떨어지는 기록만 늘리면 자신감만 잃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렇게 2005년을 보내며 자신감을 많이 잃어갔습니다.


2006년의 새출발   

 저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 까지 실무관련 경력이 많았습니다. 작은 지역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했고, 방송사 통신원, 신문사 사이버리포터 등 다양한 경험을 맛봤습니다. 그때만 해도 자신감 하나로 똘똘 뭉쳐있던 아이었는데, 언론사 준비기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점점 내 자신을 작고 초라하게 느끼게 됐습니다. 이런 상태를 유지하다간 내 자신이 망가질 것 같아서 모 토론프로그램의 시민논객을 지원했습니다. 지원서와 면접을 통해서 시민논객 활동을 시작했고, 매주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하면서 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정확히 알지 못하면 토론에서 밀릴 수밖에 없고, 다양한 팩트와 근거가 없다면 내 말에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처음에는 방송 카메라 불만 들어와도 벙어리처럼 얼어있던 제가, 시민논객 활동 3개월이 지나니 카메라 빨간 불(생방송의 표시)을 봐도 아무런 떨림 없이 질문하는 논객으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렇게 토론방법을 익히면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단 한번의 기회

올 해 상반기는 시험을 많이 볼 수 없었습니다. 연초에 인터넷 신문사에 입사해서 3개월정도 기자생활을 했고, 또 7월 말까지 모 라디오프로그램의 방송작가를 했기 때문입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하지만 그 짧았던 경험들이 필기 통과 후 실무능력 평가 때는 확실히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막연히 언론사에서 어떤 사람을 요구한다는 상상보단, 구체적으로 언론사에서 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거기에 초점을 맞춰 합숙을 들어갔습니다.

 집단토론 시간에는 시민논객의 경험을 살려서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카메라 빨간불이라고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며 토론했습니다. 1박 2일이란 시간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니기에 그 시간동안 최대한 ‘나’라는 사람의 열정과 준비과정을 어필하도록 노력했습니다. 회식시간에 술 마시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고, 자신의 장기를 보여주는 시간에는 조용히 자신있는 노래를 한 곡 불렀습니다.

문제는 북한산이었습니다. 등산을 한번 해본 경험이 없어서 조금만 뒤쳐져도 낙오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솔자 뒤를 바짝 따라갔습니다. 그렇게 산행을 마치고 합숙평가 결과를 기다리는 데 최종면접 대상자 명단에 제 번호가 있더라고요. 최종면접 당일에는 그 어느때보다 긴장되고 떨렸습니다. 면접을 보러 가기 전 워드파일을 열어서 ‘내가 면접관이라면 어떤 질문을 할까?’ 생각하며 질문을 나열해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3-4줄 정도로 정리했습니다. 짧고 간단하게, 하지만 임팩트 있게 말이죠. 질문에 답하다보면 그 답에서 또 다른 질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그 질문도 추가해 넣었습니다. 나중에 최종면접 후에 돌아와서 그 파일을 다시 읽어보니, 면접관님들의 질문을 제가 70% 정도는 예상했던 것 이었더라고요. 하지만 합격자 발표 날까지 정말 불안하고 떨리는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밤마다 잠도 안오고, 공부도 손에 안잡히는데 ‘최종합격’ 발표된 게 아니라 다른 신문사, 방송사 필기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그렇게 요동하는 제 마음을 달래며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감사하게도 인사팀의 ‘합격’ 전화를 받고, 눈물이 뺨을 적셨습니다.


어른들은 말합니다. 인생에 기회는 몇 번 온다. 그 몇 번을 그냥 다 놓치는 사람이 있고, 한번의 기회를 잡는 사람이 있다고. 저는 후자에 속한 것 같습니다. 이번 시험이 정말 제겐 좋은 기회였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해 그동안 준비했던 제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했습니다. 언론사 준비생의 길은 크게 두 갈래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시험을 여러 번 치르다 포기하고 그만두는 경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뜻을 이루는 경우.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모두 후자가 되길 바랍니다. 정말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했던 저도 ‘꿈’을 이뤘는데, 여러분들이라고 못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상식 논작스터디만 하지마시고, 토론스터디도 하시고 다양한 경험도 쌓으시기 바랍니다. 막상 면접에 가면 ‘기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지냈나?’라는 질문을 받을 때 ‘저는 줄곧 스터디만 했습니다’라고 답하는 사람보단, ‘저는 인턴기자 활동도 해봤고 **실무경험도 많이 쌓았습니다’라고 답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참, 그리고 제가 어제 알게 된 사실인데 자기소개서도 언론사별로 점수화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소개서는 최종면접에서 정말 중요한 자료로 쓰입니다. 여러분도 단 한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불타오르는 열정 속에 작은 것(자소서)부터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원하는 꿈을 꼭 이루셨으면 합니다.



열정이란 그이름   

 저는 22살에 기자의 뜻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대학교 4학년 때부터 대학원 시절까지 언론과 관련된 실무 경험을 쌓았던 것도 한 곳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열정’이란 이름은 내가 기자가 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단 하나의 희망’으로 나를 이끌어줬다고 생각합니다. ‘하고싶다’는 열정이 있다면 그 꿈은 언젠가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했습니다. 할수있는 일을 하면서 살 것인가,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살 것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치러야 하는 대가가 큽니다. 그렇지만 그만한 가치를 지불할 수 있는 의지가 있으시다면, 꼭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셨으면 합니다. 저도 이제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초년병이 됐습니다. 열정이 앞섰던 사람이라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 열정과 초심을 기억하면서 끝까지 열심히 활동하는 기자가 되겠습니다

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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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추억을 더듬어보면서 미니홈피에 있는 글을 퍼왔습니다.
2006년도에 여기자협회 책자에 실린 글이었는데. ^^;;
중부라인 용산경찰서 출입하면서 마감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주말에 짬내서 썼던 글이었어요.
그 시절 추억을 함께 공유하고자 올려봅니다.
(여기자 협회 책자는 1년에 한 번 발행됩니다.)


#수습기자일지

경향신문 45기 임현주

 

10월 9일 출정식. 기본적으로 폭탄주 5잔씩 마신 후 각자 주량에 맞게 선배들의 잔을 받았다. 모두들 긴장한 탓에 선배들이 주는 술잔은 거의 다 비웠다. 입사당시 남자동기들의 평균 주량은 소주 2병, 여자는 1병이었는데 이날 이후로 동기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주량을 반 이상 줄여서 이야기 하게 됐다.

새벽 3시30분. 동기 몇 명은 술에 취해 이미 의식을 잃었다. 갑자기 술자리는 정리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라인이 정해졌다. 나는 종로라인이었다. 며칠 전 회사에서 받은 ‘수습기자 매뉴얼’을 꺼내들고 택시를 탔다. 입에서는 술 냄새가 가득하고, 속은 울렁거렸다. 그래도 정신만은 놓을 수 없었다. 총알택시를 탄 것도 아닌데, 밤길이라 차가 없어 그런지 서대문에서 종암경찰서까지 15분밖에 안 걸렸다. 종암서부터 돌기 시작했다.

경찰을 ‘형님’이라고 부른다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들을 보니 형님이란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소속과 이름을 밝히고 들어갔다.

경찰들은 모여서 웅성웅성 대화를 나눈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이제 다시 수습이 돌기 시작한 것 같다며, 자기들끼리 피곤하고 귀찮아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종암, 성북경찰서는 당직기록부가 있어서 사건, 사고를 빠뜨리지 않고 챙길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종로경찰서에 도착했다. 종로서 형님들은 까칠한 편이라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역시 소문이 맞았다. 큰 소리로 웃으며 인사하고 명함을 줘도, ‘왔냐?’는 식으로 반응이 없었다.

데스크에서는 뭔가를 열심히 두드리는데,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면 기자출입금지 구역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침보고시간 다가오는데 보고할 것이 없다며 하나만 알려달라고 부탁하자, 얘기 안되는 폭력사건 밖에 없다며 가라고 했다. 물러설 수 없었다. 얘기 안되도 좋으니 몇 개만 알려달라고 했다. 안 그러면 선배가 라인 안돌았다고 의심한다고 선배를 팔았다.

그렇게 단순 폭행, 상해 등 몇 건을 챙기고 6시 30분에 첫 보고를 했다.

종로라인 1진이 전날 야근이어서 혜화라인 선배께 전화를 걸었다. 기자수첩에 메모한 것을 보면서 사건보고를 했더니, 야마 잡아서 5분후 다시 보고하라고 했다. ‘야마’라는 말뜻을 몰랐던 나로선 순간 당황했다. 동기 중에 가장 똘똘해보였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야마가 뭔지 알아?”

“응, 나도 야마가 뭔지 모르는데 아마 개요를 잡아서 핵심만 보고하란 말인 거 같아.”

다시 사건사고 내용을 정리해서 육하원칙에 맞춰 야마를 잡고 보고를 했다. 간신히 한 고비를 넘겼다. 사건사고를 보고하고 났더니 선배가 묻는다. “소방서는?”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다. 소방서를 챙겨야하는지 몰랐다. 매뉴얼을 꼼꼼히 읽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선배께 변명아닌 변명을하며, 경찰서 3군데 도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려 소방서는 갈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선배는 귀신같이 매뉴얼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 매뉴얼내용을 정확히 확인하고 어디를 체크해야하는지 다시 보고하라고 했다.

첫날, 첫 보고는 9시가 되도록 끝날 기미가 안보였다. 종로 1진선배가 전날 야근을 해서 혜화라인 선배께 보고했던 건데, 우리라인 1진이 아닌 게 천만 다행이라며 위안을 삼았다.

그렇게 삼일 연속 제대로 눈 한번 못 부치고 밤에는 경찰서, 낮에는 집회 시위현장을 찾아다녔다.

나흘째 되던 날이다. 머리에 기름이 좔좔 흐르고, 세수는 언제 했는지 피부가 거칠게 느껴졌다. 정말 씻고 싶은 욕구가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아침 보고를 마치니 선배가 식사하고 라인에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다. 종암서 2분거리에 있는 찜질방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핸드폰을 검은 비닐봉지에 넣고 찜질방으로 향했다. 일회용 샴푸, 린스 등을 사서 초스피드로 샤워를 했다. 혹시나 비닐봉지 안에 핸드폰 벨이 울리면 어쩌나 새가슴처럼 그렇게 마음 조렸다. 다행히 9시까지 선배의 전화는 한 통도 없었다.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씻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시간이 지나니 틈틈이 잠을 자는 방법도 터득하기 시작했다. 종로라인을 혼자 돈지 일주일만에 KBS 경력기자들이 하리꼬미를 시작했다. 드디어 동지가 생겼구나 싶은 마음에 감격이 밀려왔다. 난 그 사람보다 겨우 일주일 먼저 종로라인 생활을 한 것인데, 마치 종로 1진이라도 된 것처럼 종로라인 형사들의 특징, 라인의 특성을 설명해줬다. 라인에 적응이 될 무렵 캡께서 라인을 바꾸셨다. 이번 수습은 특별히 서울시내 9개 라인을 모두 경험해보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두렵기도했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담감과 이제 막 얼굴 익히고 정들게 된 형사와의 이별이 아쉬웠다. 언젠가는 다시 종로 1진으로 오겠다며 인사를 하고 중부라인으로 옮겨갔다.

남대문, 중부, 용산. 용산경찰서에는 외국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한번은 러시아 사람이 절도미수로 들어왔는데, 폭력 4팀장이 그 사람을 강제추방 시키겠다고 했다. 남자는 오케스트라 단원이었고, 자신은 슈퍼에서 물건을 훔치려 했던 게 아니라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어서 들어갔던 것뿐이라고 했다. 조사가 끝난 후 4팀장에게 부탁해 러시아 사람과 대화를 더 나누기 원한다고 했다.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딱한 사연이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속했던 오케스트라단의 임금문제도 있었다. 팀장에게 그 사람의 사정을 말했고, 강제 추방될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오케스트라 쪽에서 담당자가 나와 러시아 사람의 신원보증을 섰고, 그렇게 그 남자는 풀려났다.

정확히 사건 발생 4일 후. 또 같은 남자가 불려왔다. 그때는 이미 내가 중부라인에서 마포라인으로 옮긴 후였다. 하리꼬미 생활 5주차 만에 거쳐 왔던 라인에서 다시 취재를 하게될 줄은 몰랐다. 이번에는 러시아 남자가 3만원 상당의 위스키를 편의점에서 훔친 것이다. 경찰은 러시아어 통역이 없어서 6시간 째 통역원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갑자기 나를 보더니 경찰이 옆에 앉아서 통역 좀 해달라고 부탁 했다. 8년간 러시아에서 생활했던 까닭에 물 만난 고기처럼 한 시간 넘게 통역해주고 통역비 2만 5천원을 받았다. 취재 내용은 경향신문만 단독으로 기사화 됐고, 통역비로 받은 돈으로 용산서 폭력팀에 통닭 2마리를 쐈다. 수습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고 뿌듯했던 순간이었다.

다시 마포라인으로 돌아와 은평,서부,서대문, 마포를 매일 챙기는데 8주차가 넘어가니 이제 얘기안되는 단순폭력사건은 보고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번은 야근보고를 하는 데 서부서에 절도 1건이 들어왔다. 가정주부가 슈퍼마켓에서 2천 5백원짜리 냉동만두를 계산안하고 가져가다 직원에게 붙잡힌 것이다. 생계형 절도인지 알아보려고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경찰은 충동에 의한 절도라고 했다. 지갑에 8만원정도 돈이 있었고, 아주머니는 슈퍼에 손님이 많다보니 자기 하나쯤 만두를 훔쳐가도 직원이 모를 줄 알았다고 했다. 이 내용을 그대로 야근 선배에게 보고하는데, 선배는 그 사람의 가족관계 등 더 알아보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얘기가 안되는 건인데 어쨌든 선배 지시가 있으니 선배 말을 따랐다. 야근 2차보고 때 추가 취재한 부분을 이야기하는데 선배가 묻는 질문에 곧바로 대답을 했더니, 선배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 냉동만두 1봉지에 만두 몇 개가 들어있던 거래?”

할 말을 잃었다. 난 그 부분까지 미처 확인하기 못해 죄송하다며 전화를 끊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죄송할 내용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 선배에 얽혔던 수습 초기 야근보고가 떠올랐다. 야간에 술에 만취한 사람이 택시를 타자마자 이유없이 택시 유리창을 주먹으로 쳐 앞 유리가 금이 갔던 사건이었다. 취재 내용을 보고했더니 선배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그 승객이 택시 앞유리의 왼쪽 부분을 친거야, 오른쪽 부분을 친거야. 손가락에 피가났다면 어느 손 몇 번째 손가락에 피가난건데? 피는 얼만큼 흘렸데?”...

그 이후로 그 선배가 야근하는 날이면 냉동만두 몇 개들었는지 고민해야 할 정도로 긴장하곤 했었다.

어느덧 수습생활한 지 3개월이 지났고, 사회부에서 경찰기자 생활한 지 12주가 됐다. 야근보고 시간도 풀려서 이젠 출퇴근도 가능해졌다. 돌아보니 영화 속 필름처럼 기억이 생생하게 펼쳐지는데 언젠가 나도 선배가 돼 웃으면서 후배들과 수습시절 이야기를 나눌 날이 올 것을 기대해본다.

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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