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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호 월간조선 /임현주 경향신문 체육부 야구전문 기자
  [인물연구] 2007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제패한 김성근 SK 감독
 2006년 6위 팀을 우승까지 견인한 힘은「무한 경쟁」
 
한 번 날아간 공은 다시 오지 않는다!

1942년 일본 교토 출생. 일본 교토 가쓰라高 졸업, 동아大 중퇴, 교통부 선수,
기업은행 선수, 마산商高 감독, 기업은행 감독, 프로야구 OB 코치, OB 감독,
태평양 감독, 삼성 감독, 쌍방울 감독, LG 감독. 일본 지바 롯데 마린스 코치 역임.
현재 SK 감독.

프로감독 데뷔 23년 만의 첫 우승

가을밤이 깊어 가던 지난 10월29일 인천문학구장.
 
  SK 와이번스 金星根(김성근·65) 감독은 프로야구 감독 데뷔 23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2연패를 한 뒤 4연승 하는 진기록을 추가했다.
 
  지난 10월31일 오후 2시. 서울 청담동 리베라호텔 커피숍에서 金星根 감독을 만났다. 같은 시각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는 프로야구 2007 신인왕과 MVP 시상식이 열리고 있었다.
 
  『11월5일 일본으로 출국할 예정이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는 金감독을 졸라 어렵게 시간을 만들었다. 청바지를 즐겨 입는 金감독은 짙은 남색 면바지에 흰색 셔츠, 검은색 니트를 입고 나왔다.
 
  ―이틀 동안 좀 쉬셨나요.
 
  『우승하던 날 샴페인 세례를 받아서 감기에 걸렸어요. 시즌 때는 경기 구상을 하느라 두세 시간밖에 못 잤는데, 요즘은 감기 때문에 잠을
설쳐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소감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너무 정신없이 지나갔거든요.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축하전화를
 받을 때 우승했다는 실감이 나요』
 
  ―우승하고 가장 먼저 생각났던 사람은 누군가요.
 
  『집사람이죠. 40년 같이 살면서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항상 나를 위해 기도해 줬고, 말없이 곁에서 힘이 되어 줬습니다』
 
  ―「야구의 神」이라는 별명을 갖고 계신데, 어떻게 생긴 건가요.
 
  『삼성 김응룡 사장이 붙여 준 별명이지요. 2002년 LG를 이끌고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서
삼성한테 2승4패로 졌어요. 김응룡 사장이 한국시리즈 우승 후 인터뷰에서 저를 「야구의 神」
이라고 불렀대요. 시합에 진 내가 神이면, 神을 이긴 사람은 뭡니까(웃음).
하늘인가요?』
 

지난 10월29일 인천문학야구장에서 열린 2007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SK가
두산을 맞아 승리한 후 SK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다.

 
  「야구의 神」
 
  ―김응룡 사장이 「야구의 神」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시즌 내내 LG가 삼성만 만나면 성적이 형편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시리즈에 나선
김응룡 감독이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이더라고요. 그동안 삼성만 만나면 필요 이상으로
긴장했는데, 삼성도 우리와 똑같은 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여유를 가지니까 金감독의 수가 보였어요. 제가 김응룡 감독을 읽으니까, 金감독이
고생을 많이 했죠. 그래서 저를 「神算(신산)」이라고 평가해 준 모양입니다』
 
  ―정규시즌에서 1위를 차지해서 한국시리즈로 직행한 SK가 한국시리즈 1·2차전에서
연패했습니다. 왜 그렇게 됐나요.
 
  『이번 시즌에 두산만 만나면 참 힘이 들었어요. 어차피 일곱 경기 중 4승을 먼저 한 팀이
이기는 것이니까, 한국시리즈 1·4·7차전을 내주고 2·3·5·6차전을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했어요.
 두산 에이스 리오스 선발 때는 과감하게 경기를 내주고, 나머지를 잡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초반부터 계산이 어긋났습니다. 두산이 워낙 강하다는 인식이 박혀 있어서
저나 선수들이나 많이 긴장했어요.
2차전에서 예상했던 시나리오가 빗나갔고, 어긋난 계산에 집착하다 보니 선수교체
타이밍을 계속 놓쳤습니다』
 
  ―金星根 감독의 상징은 「데이터 야구」입니다. 왜 1·2차전에서 계산이 맞지
않았나요.
 
  『정규시즌 1위를 확정짓던 날(9월28일) 한국시리즈 맞상대로 두산을 염두에
뒀습니다. 두산에 관한 데이터를 집중분석했고, 두산 선발투수에 맞춰 「맞춤훈련」을
 시켰습니다.  두산은 어리고 경험 없는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보이고 있었어요.
발 빠른 두산의 이종욱과 고영민의 도루 견제를 위해 「피치 아웃」 훈련까지
 했으니까요. 너무 데이터에 집착하다 보니까 조금만 계산이 어긋나도 생각이
복잡해지더군요』
 
김성근 감독은 자신만의 기록법을 개발해 경기상황을 실시간으로 적는다.
고등학교를 일본에서 나온 까닭에 일본어로 쓰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한다(사진 왼쪽).
1982년 OB 코치시절부터 야구일기를 써 왔다(사진 오른쪽).

 
  『무한경쟁은 기회를 공평하게 주는것』
 
  ―3차전 이후 분위기가 확 달라졌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3차전부터 데이터에 집착하지 않았어요. 「작은 것에 집착하기보다 타이밍을 놓치지 말자」
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차피 4승을 챙겨야 끝나는 게임이니까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선수들에게 「편하게 경기를 하라」고 주문했더니, 3차전부터 선수들 방망이가
터졌습니다.
 3차전에서는 우리 선발투수 로마노가 잘 던져 줬고, 4차전에서는 왼손 투수 김광현이 잘
해줬습니다. 2패 후 2승을 챙기니까 자신이 생기더군요. 말을 아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준비했습니다』
 
  ―3차전 「빈볼싸움」 이후 SK 선수들의 氣(기)가 무섭게 살아났는데.
 
  『SK 선수들은 정말 순박하고 순진합니다. 누구 하나 나서거나 말 많은 선수가 없습니다.
두산은 베테랑 선수 홍성흔, 김동주 등 경험 많은 선배들이 후배들을 이끌잖아요.
「파이팅」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팀입니다.
 
  단기전에서는 선수들의 氣가 특히 중요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 들지 말고, 절대
 氣싸움에서 밀리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선수들이 그 지시를 잘 지켜 줬던 거죠』
 
  ―2007 시즌 동안 SK에는 고정된 4번타자가 없었습니다. 타순과 수비 위치를 매일
바꾸셨죠.
「토털 야구」, 「벌떼야구」라는 이름을 얻었구요. 무한경쟁이 선수들에게 큰 마음의
짐이 됐을 텐데.
 
  『1년 전 SK 선수들을 고려대학교 송추 구장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때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형편없었어요. 「이렇게 야구를 하니까 2006년 시즌 6위를 했구나」 싶더라고요. 저는 「이기는 야구」가 뭔지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무한경쟁은 반대로 말하면 기회를 공평하게
 준다는 얘기입니다. 한두 명의 스타 플레이어에 의존하지 않고, 모두 노력해서 발전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지요』
 
 
  『하고자 하는 의욕과 열정이 생겼다』
 
김성근 감독이 끼고 있는
반지는 지바 롯데 마린스
 코치 시절 2006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김감독은 코치로서
「2006년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으로서「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진귀한 기록을
세웠다.

  ―지난 1년간 SK 선수들이 가장 변화된 부분은 뭔가요.
 
  『하고자 하는 의욕과 열정이 생겼지요. 그게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한국시리즈에 나서면서 선수들에게 「야구장에서 절대 고개 숙이지 마라. 자신 있게 해라. 즐겨라」 했습니다. 김재현, 박재홍, 박경완 같은 고참들이 옛날 전성기 때의 스윙을 되찾고, 어린 선수들이 기대 이상으로 좋은 경기를 보여 줬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선수들이 깨달았습니다. 2008년에도 SK의 무한경쟁은 계속됩니다. 「선발 라인업 고정」이 무리라는 것을 선수들이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2007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되던 날 기자들을 한바탕 웃게 만든 소동이 벌어졌다.
 
  점잖은 金星根 감독이 잠실 원정경기에서 3연승을 챙긴 그 느낌을 간직하려고 점퍼 속에, 원정경기 때 입는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날씨가 쌀쌀했던 탓에 金감독은 원정 유니폼 입은 걸 들키지 않았다. 선수들이 헹가래를 치고 샴페인을 퍼붓는 동안에도 감독은 점퍼를 벗지 않았다. 우승 시상식을 하기 위해 우승 기념 티셔츠를 갈아입으려고 金감독이 점퍼를 벗는 순간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金星根 감독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올 시즌에 또 하나의 「징크스」가 생겼습니다. 시즌 중에 집에 다녀오는 날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입니다. 이번 시즌 후반에 원정경기를 가기 전 집에 들렀다 가면 그 경기는 꼭
이기더라고요. 시즌 후반부터는 원정경기를 하러 아무리 일찍 출발해도 무조건 집에 들렀다가
갔습니다』
 
 
  아들 김정준이 말하는 金星根 감독
 
김포공항으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사진
왼쪽부터 김성근 감독의 외아들 김정준씨,
김성근 감독, 임현주 기자.

  SK 전력분석원 팀장 김정준(37)씨는 김성근 감독의 외아들이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김정준씨는 충암中·高를 거쳐 연세大에서 선수생활을 계속했다. 1992년 LG에 입단하며 프로선수가 됐다.
 
  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1년 반 만에 선수생활을 접었다. 이후 11년간 LG 전력분석원으로 일을 했다. 2001년 시즌 중간에 부친 金星根 감독이 감독대행으로 LG로 부임했고, 처음 함께 일을 했다.
 
  2001년 6위였던 팀을 1년 만에 2위로 끌어 올렸는데, LG는 김성근 감독을 해고했다. 김정준 전력분석원은 LG를 떠나 2003년부터 SK에 몸을 담았다. 지난 11월3일 오전 9시30분. 김정준 팀장과 서울역에서 만났다. 3시간 동안 KTX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金星根 감독이 SK 감독직을 제안받았을 때 처음에 거절했고, 가족회의 끝에 마지못해 SK행을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일본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의 코치를 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편한 시간을
보내고 계셨어요. LG 감독을 그만두시고 일본에서 자리 잡아 롯데 마린스가 우승까지 해냈잖아요.
또다시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 돌아오기 싫으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일본에 계실 때
「코치가 이렇게 편한 줄 몰랐다」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일본에 남기를 원하셨는데 가족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었어요. 막내 동생 희성이가 아버지 밥 해드리느라 2년 가까이 일본에서
생활했어요. 동생도 나름대로 지쳐 있었고요. 그래서 가족들이 모두
「SK 감독을 하셨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다시 1년간 함께 일해 보니 어떤가요.
 
  『아버지가 한국에 오시기로 결정하고나서 저를 불러서 「3년 정도 일본에서 공부를 하라」고
했어요. 롯데 마린스에서 저를 연수시키기로 얘기가 다 끝난 상태였어요. 월급은 70만 엔을 주고,
아버지가 일본에서 사셨던 집을 그대로 쓸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저야 배우는 입장에서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거절했습니다』
 
 
  감독이라는 고독한 직업
 
  ―그렇게 좋은 기회를 왜 잡지 않았나요.
 
  『앞으로 아버지 얼굴을 보고 함께할 날이 많이 남지 않았더라고요. 전에 LG 감독 하실 때 정말
힘들었던 과정이 자꾸 생각났어요. 이번만큼은 꼭 곁에서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어요. 어머니께서
제가 아버지와 함께하기를 바라셨고요. 지금 돌아보니 그때 결정을 참 잘한 것 같아요.
 
  경기에서 진 날은 감독실에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수석코치도 못 들어가죠. 한번은 아버지
혼자 머리 싸매고 계시는 감독실에 들어가서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가 나왔어요.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아버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죠. 「대장이 힘들어하면 어떻게 합니까. 힘내세요.
사랑합니다」 라고요』
 
  ―한국시리즈 초반에 2연패 했을 때는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2연패 하고 하루 쉬었잖아요. 충격이 너무 커서 제가 삭발을 했습니다. 두산 선수들의
모든 정보를 모으고 철저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허무하게 무너졌거든요. 그날 감독실에
새벽 1시까지 불 켜진 것을 보고 나왔어요. 아버지는 새벽 4시까지 3차전 고민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경기를 포기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더라고요. 아버지 입장이 한번 되어 봤어요.
 
  아버지는 이미 내 나이 때 감독을 하고 계셨고, 스무 살 청년 때 혈혈단신으로 한국 땅을 밟으셨는데
 위기의 순간에서 청년 김성근은 어떻게 했을까? 아버지라면 도망가지 않았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시작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머리를 잘랐습니다. 선수들이 제 머리를 보고 자극을
받은 것 같아요. 제가 삭발한 걸 보고 아버지도 놀랐다고 하시더라고요』
 
 
  「빈볼싸움」의 영향
 
한국시리즈 우승 자축연에서 SK 선수들이 김성근 감독에게 샴페인을 쏟아붓고 있다.

  ―3차전 때의 빈볼싸움이 SK 우승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플레이오프 때부터
한국시리즈
1·2차전까지 두산의
젊은 선수들이
신들린 듯 야구를 했어요.
 4번 타자
김동주나 베테랑 안경현,
 홍성흔이 뒤에
서 후배들을 받쳐 주니 「
5연 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이어 갔던
 것이죠.
그런데 3차전 빈볼싸움에서
김동주와
리오스가 심하게
흥분했어요.
 
빈볼싸움 전까지 두산의 이종욱, 김현수,
고영민이 시즌 때처럼 편하게 경기를
했었는데 고참 선배들이 크게 흥분한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그러면서
두산 젊은 선수들의 氣가 꺾인 것 같아요.
반대로 우리 팀 선수들의 氣는 살아나고,
 집중력이 향상된 것 같습니다』
 
  ―당시 두산 쪽에서 「SK가 고의적으로 빈볼을 많이 던진다」고 문제를 제기했죠.
 
  『1·2차전에서 투수들에게 「몸쪽 공을 많이 던지라」고 주문한 바람에 사구가 7개나 났습니다.
 고의성은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데 3차전이 끝나고 두산에서 `「그렇게까지 해서 이기고
싶냐」고 인터뷰를 했어요.
 
  두산 선수들은 발이 빠른 장점을 살리기 위해 어떻게든 출루해야겠다는 의욕이
 대단했어요. 우리 투수로서는 까다로운 볼을 선택할 수밖에 없죠. 두산이 흥분할수록
우리는 더 침착해졌어요. 그러면서 자연히 경기 흐름이 우리 쪽으로 넘어온
것 같습니다』
 
  ―우승이 확정됐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정말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와 막내 동생에게 정말
고마웠습니다. 시즌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성수동 집에서 인천까지 밥을
지어 날랐거든요. 항상 아버지와 SK를 위해서 기도해 줬습니다』
 
  ―어린 시절에 봤던 아버지 모습은 어땠어요.
 
  『말이 없으셨어요. 집에 오시면 아버지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어머니가 늘
「아버지는 밖에서 고생하시고 들어오니까, 집에서 편하게 쉬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한다」
고 말씀하셨어요. 올해 처음으로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것 같습니다』
 
  ―일본어는 아버지께 배웠나요.
 
  『아버지가 집에서 한국말로도 말을 안 하시는데 어떻게 일본어를 배웠겠습니까.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LG에 입사했을 때 6개월 동안 학원 다니면서 공부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일본 전지훈련 갈 때마다 조금씩 사용하면서 늘었습니다』
 
  ―앞으로 바람은.
 
  『시즌 초반에 아버지께서 몸이 몇 번 안 좋으셨어요. 한번은 밥숟가락을 못 들을 정도로
왼쪽 팔꿈치에 이상이 왔었어요. 왼손잡이인 아버지가 왼손으로 사인을 못 할
 정도였습니다.
 
  시즌 중간에 하루 동안 소리 소문 없이 일본에 가서 치료를 받고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늘 건강하신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한국시리즈 때는 신경성 대장염으로 벤치를
지키는 게 힘들었어요. 아버지가 감독직을 하시면서 아프지 않고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능력이 닿는 한 아버지 뒤에서 힘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다섯 번째 주례
 
해운대 앞의 한 식당에서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김성근 감독.

  서울 청담동의 리베라호텔에서
 잠깐 인터뷰를 하긴 했지만,
 月刊朝鮮에 실을 긴 기사를
 쓰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
月刊朝鮮을 위해 시간을 더 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金星根 감독은
『11월5일에 일본으로 간다. 그 전에
정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내 사정이 딱해 보였던지 평소 알고
지내는 아들 김정준 팀장이 『아버님이 토요일인 11월3일 부산에서 주례를 보신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주례를 끝낸 金감독을 붙들고 이야기를
 나눌 심산으로 김정준 팀장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해운대 앞 오션두 웨딩홀 20층에 도착한 것은 11월3일 오후 2시쯤이었다.
 金星根 감독은 주례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金감독은 『생에 다섯 번째 주례』라고 했다.
 
  한국시리즈 3차전이 열리던 10월25일 SK 톱타자 정근우(25)가 감독실을 노크했다.
11월3일 부산에서 결혼을 하는데 주례 확답을 받기 위해서였다. 정규시즌에서 3할대 타율을
유지했던 정근우는 한국시리즈 1·2차전 동안 안타가 없었다.
 
  金감독은 정근우에게 『주례를 서 줄 테니 마음 편하게 경기하라』고 말했다. 그날부터다.
정근우의 방망이는 불을 뿜었다. 6차전 때는 2점 홈런포를 쏘아 올리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金감독은 『주례 부탁이 들어오면 대개 거절하는데, 큰 시합을 앞두고 선수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며 『정근우가 감독의 약점을 잘 파고들었다』며 웃었다. 金감독은 『주례사 고민하는 게
 야구 경기 오더 짜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했다.
 
 
  숫자「8」
 
신혼시절의 김성근-오효순 부부.

  金감독의 주례사는 2007년 한 해 동안 인연이 닿았던 숫자 「8」에 관한 이야기였다.
 
  『신랑 정근우는 발이 빨라 야구할 때만 「스틸」을 하는 줄 알았는데 예쁜 신부감을 「스틸」하는 능력도 있었네요. 신랑의 선수 번호 「8」은 올 한 해 저와 큰 인연이 있었습니다. SK가 올 시즌 첫 승을 거둔 날이 4월28일이었고, 정규시즌 1위를 확정짓던 날이 9월28일이었습니다. 숫자 8은 중국에서는 「행운」을 뜻하고, 유교에서는 「지혜」를 뜻합니다. 이슬람에서는 「성스럽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두 사람이 결혼생활을 하면서 숫자 8처럼 균형 있게 밸런스를 이뤄 행복한 결혼생활을 만들어 가기 바랍니다. 8은 위아래 균형이 흔들리면 다른 한쪽으로 무게가 더 실리게
됩니다. 그래도 부부는 8처럼 항상 붙어 있어야 하는 운명이란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주례사가 끝나자 큰 박수가 터져나왔다. 金감독은 『주례사를 준비하면서 시간이 길어지면
 어쩌나, 혹시 발음을 못 알아 듣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고민했다』며 『박수소리에 긴장했던
 마음이 다 녹아내렸다』고 했다.
 
SK의 우승이 확정된 직후 SK 선수들이 구단주인 최태원 SK 회장을 헹가래 치고 있다.

  결혼식이 끝나고 金감독과 함께 식당으로 갔다.
 
  ―신랑·신부보다 주례가 더 긴장을 한 것 같습니다. 힘드셨죠.
 
  『야구할 때는 더그아웃에 앉아서 오더를 내리면 되는데 결혼식 주례는 한참을 서 있어야 하니 힘이 더 드네요. 다리가 아파서 혼이 났습니다. 일본 가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이제 다 매듭지은 것 같네요』
 
  金감독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한참을 일본어로 통화했다. 잠시 후 또 전화벨이 울린다. 이번에는 한국어로 통화했다. 전화를 끊더니 金감독은 『11월5일 비행기 스케줄을 다음날로 미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최태원 회장의 전화
 
SK 우승기념 티셔츠를 입은 최태원 회장.

  ―무슨 전화인가요.
 
  『SK 최태원 회장이 5일날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네요. 바쁘신 분께서 일부러 약속을 다 미루고
시간을 냈다는데, 제가 비행기 시간을 좀 늦춰야죠.
 한국시리즈 중에 최태원 회장님이 몇 번 응원을
오셨잖아요. 정말 힘이 되더라고요. 회사 차원에서
더 많이 도와주려고 하고. 이젠 한국 야구도 母기업에
도움 받는 차원을 벗어나서 구단 운영을 잘 해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독립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金감독은 일본 인맥이 넓다. 그는 『한국시리즈가
끝났으니까 해주는 얘기』라며 『일본의 친구가 전해
 준 정보로 두산전을 수월하게 풀어갈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一球二無
 
국가대표 시절의 김성근 감독.
뒷줄 왼쪽.

  『플레이오프 전에 일본에서 전화를 한 통 받았어요. 두산의 김동주가 일본 에이전트와 비밀리에 계약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두산 4번 타자 김동주가 올해 FA(자유계약 선수)되는 해잖아요. 일본으로 진출할 계획이라는 말이 많았는데, 그 전화를 받고 나니까 김동주의 행동을 더 유심히 관찰하게 되더라고요. 수비가 시즌 때 같지 않고, 타석에서 전같은 열의가 안 보였어요. 「마음이 떠났구나」 싶더라고요』
 
  金星根 감독은 식사할 틈이 없었다. 신랑·신부의 친인척, 친구들이 흰 종이를 가져와 사인해 달라며 줄 서서 기다렸다. 金감독은 종이에 「一球二無(일구이무)」라는 글귀를 적었다.
 
  ―「一球二無」가 무슨 뜻인가요.
 
  『일구이무요. 한 번의 공은 두 번 다시 없다. 즉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것이죠. 투수는 매 순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던지고, 타자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스윙을 하면, 9회말 투아웃에서도 기적은 일어나요. 제 야구인생의 철학입니다』
 
  김성근 감독, 김정준 팀장과 함께 김해공항으로 이동했다. 오후 7시20분 김포행 비행기를 탔고,
대화는 계속됐다.
 
  ―그동안 한국에서 고생하신 보람이 있으시죠.
 
  『저는 인생에 있어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승하고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하기도 했어요.
 
  「동지보다는 적이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우승하니까 저를 싫어했던 사람들까지 저를 인정을
해주더라고요. 젊었을 때 한국말이 짧아서 「반 쪽바리」라는 수모를 겪었어요. 마음 터놓고
대화할 사람이 많지 않았죠.
 
  그런데 이번에 우승을 하면서 「그래도 적보다 동지가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 혼자만의 힘으로 우승한 것이 아니었어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더 걱정해 주고,
 생각해 준 덕분이었어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원래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신가요.
 
  『원래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어요. 17세가 되던 해 재일교포 선수 출신으로
봉황기(1959년)에 참가하면서 처음 한국 땅을 밟았죠. 그리고 이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행을 택했어요. 동아대학교와 교통부에서 활동하다가, 1962년 신생 기업은행에 발탁돼
본격적으로 야구선수 생활을 시작했어요. 어려움이 많았죠.
 
  환경 낯설지, 한국말 서투르지… 적극적이고 활달했던 성격을 점점 잃어버리게 되더라고요.
일본에서 학교 행사 때마다 사회를 보는 게 저였어요. 공부하기 싫은 날 운동장에 나가면
 같은 반 친구들이 우르르 따라 나왔어요. 그때는 밝고 씩씩했던 것 같아요. 한국에 와서 한국말을
 못 하다 보니 말수가 적어졌고, 성격이 좀 바뀌었지요』
 
 
  혹독한 조련
 
롯데 마린스 감독으로 2006년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 보비 발렌타인.

  ―金감독이 1989년 1월 태평양 선수단을 이끌고 오대산
극기훈련을 가서 얼음 깨고 물속에 들어가게 했던 일이
전설처럼 전해져 옵니다.
 
  『타자는 하루에 2000~3000개씩 배팅 연습을 시켰고, 투수는
500개씩 던지게 했어요. 선수들의 장래가 내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힘든 훈련을 강행했던 것이죠. 제가 선수 시절에는 팔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이 심해도 감독 오더가 내려오면
무조건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꾹 참고 공을 던져야 했지요. 저는
 좀 무식하게 운동을 했지만, 선수들을 혹사시킨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합에 내보낼 선수들은 어떤 기준으로 고르고, 타순을
 정합니까.
 
  『정신력이 가장 중요하죠. 저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합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면, 더 노력하면 되잖아요. 정말 열의 있게 하는 선수에게
기회를 줍니다. 지바 「롯데 마린스」의 보비 발렌타인 감독에게서 많이 배웠습니다.
 
  이분은 선수의 컨디션을 중요시하고, 절대 선수 앞에서 험담을 안 합니다. 선수가 타석에서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결국 그 책임은 선수를 기용한 감독에게 있거든요. 선수를 탓하기 전에
그 선수를 가르친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는 게 진정한 감독이죠. 보비 발렌타인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에게 장난을 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선수들이 경기를
즐길 수 있도록, 그걸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성수동 자택에서
 
  비행기 안에서 金감독에게 『성수동 자택에
일본어로 된 책이 800권 가까이 있다는데 꼭 한번
보고 싶다』고 부탁을 했다. 『金감독의 선수 시절
사진도 보고 싶다』고 했다. 金감독은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내릴 때까지 아무런 「사인」을 주지
않았다.
 
  공항 대합실에서 金감독이 『집이 지저분할 텐데
 괜찮냐』고 물었다.
 
  11월3일 오후 9시쯤 서울 성동구 성수동 金감독의
자택에 도착했다. 金감독이 벨을 누르자 부인
오효순(61)씨가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사모님께서 내조를 잘 하셔서 金星根 감독이
밖에서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말하시던데요.
 
  『아니에요. 밖에서 고생하는 분이 힘드시지, 저는 그냥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예요.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가 서재입니다. 거실에 따뜻한 커피 준비했으니까 둘러보시고 나오세요』
 
  金감독의 부인은 하얀 피부에 선한 인상만큼이나 목소리가 고왔다. 간단한 다과를 준비한다며
금세 주방으로 갔다. 집 안에 화분이 가득했다.
 
  『집사람이 다 가꿔요. 나야 가꾸는 게 힘든지 잘 모르죠. 식탁 위에 있는 것은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보내온 선물이에요. 이번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더니 일본에서 선물로 보내 줬네요.
 집 안에 꽃과 식물이 있으니까 공기가 맑아서 좋아요』
 
  거실 한쪽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적힌 액자가 보였다.
 
  ―교회에 나가십니까.
 
  『아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나보고도 교회에 나오라고 하는데, 잘 안되네요』
 
  서재로 들어갔다. 수백 권의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1982년부터「야구일기」써
 
김성근 감독은 부인 오효순씨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사진 맨 오른쪽은 며느리이다.

  ―대부분 일본어로 된 책이군요.
 
  『한국에는 야구 관련 서적이 별로 없어요. 일본에서 사서 모았습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야구를 배웠어요. 틈나는 대로 책 읽고, 생각하고, 그걸 적용했죠』
 
  ―서재에서 50년 가까이 야구를 해온 발자취가 느껴집니다.
 
  『옛날부터 써왔던 야구일기, 노트예요. 1982년 프로야구가 처음 창단된 해에 기록했던 수첩이에요. 한번 보세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야구 일기를 썼어요. 야구 기록지 대신 나만의 기록법을 개발했지요. 타자들이 볼카운트 몇 대 몇에서 어떤 스윙을 하는지, 각 투수별로 자신 있는 구위는 무엇이고 위기의 상황에서 어떻게 승부를 보는지 자세히 적혀 있어요. 초록색 커버로 「OB」라고 적힌 노트를 보니까 세월이 느껴집니다』
 
  ―손으로 적는 게 귀찮을 때도 있을 것 같은데요.
 
  『컴퓨터로 자료를 뽑아서 보면 머릿속에 저장하기가 힘들어요. 손으로 기록해야 기억이 오래 남고, 급박한 상황에서 신속하게 정보를 꺼내 쓸 수 있어요. 그래서 손으로 쓰는 거죠』
 
  잠시 후 아내 오효순씨가 수정과에 잣을 띄워서 갖다 줬다.
 
  ―金감독이 『집에만 가면 어린아이가 된다』고 말씀하던데요.
 
  『집에서는 편하게 쉬셔야죠. 제가 뭘 해드리는 게 있나요. 더 잘 해드려야죠』
 
  ―교회를 열심히 다니신다고 들었어요.
 
  『제가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거든요.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남편을 위해
기도해 주시죠』
 
  잠시 후 막내딸이 앨범을 갖고 서재로 들어왔다. 앨범 속에서 「소년 김성근」,
「청년 김성근」, 그리고 「감독 김성근」을 만날 수 있었다.
 
 
  2008년 구상
 
  金星根 감독은 지난 9월28일
정규리그 1위를 확정짓던 날부터
 내년 시즌 준비에 들어갔다. 틈틈이 SK 2군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봤다. 金감독은
『11월8일부터 11일까지 일본에서
벌어지는 「코나미 컵」을 마친 후 본격적으로
다음 시즌 구상에 들어갈 생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2008년 구상은 대충 마무리된
 상태였다.
 
  『시즌 중간에 2군 선수를 데려다가
 경기에 쓰고 싶어도, 기량 차이가
크더라고요. 2군 선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어요. 2008년 SK는 1·2군 간의 무한경쟁을 할 겁니다. 구단에서 2군 선수 지원 비용으로
 5억원을 투자하겠다고 하니까, 일본 코치를 몇 명 뽑아서 혹독한 겨울훈련 체제로
들어갈 겁니다.
 
  2군 선수들의 기량을 끌어 올리는 게 한국 프로야구가 발전하는 길입니다.
2군 선수들에게도 희망이 있어야지요. 그래야 1군 선수들이 더 자극받고 열심히 할 테니까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2008년 시즌 개막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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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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