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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 사람의 삶을 통하여, 들여다 보는 러시아 미술사와 당시의 시대적 배경들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뜨레찌야꼬프 미술관(위의 사진참조)-
러시아에는 상인이면서 미술 애호가였던 "뜨레찌야꼬프" 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1856년부터 자신의 생가에 그림을 한점씩 사들이며, 자신이 소장할 수 있는 최대의 한도로 40년동안 그림을 모읍니다. 11~ 19세기에 걸친 러시아 화가들의 그림을 사고, 가난한 화가들에게 재정적인 도움과 후원을 합니다. 뜨레찌야꼬프가 사망후 , 자신의 집과 그림을 모스크바 시에 기증함으로써, " 뜨레찌야꼬프 미술관"으로 불리게 되다, 현재 규모를 더욱 확장해 러시아 국립 미술관으로써 6만 여점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미술관에 소장된 그림의 특징은 대부분 회회 중심의 그림들로 , 유화 작품도 많이 있습니다. 11~16세기는 성화(러이아어: 이콘)가 대부분이며 , 성화는 특별히 온도와 습도 조절로의 보관상의 문제로 따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뜨레찌야꼬프 미술관을 갈때마다, " 뜨레지야꼬프에게는 사람의 잠재력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미술 세계사를 배울때 시험문제에 나왔떤 '이동파 화가' 를 기억하실 것 입니다. 바로 뜨레찌야꼬프가 살아있을 당시의 러시아 '이동파 화가'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은 이름이 아닙니다.

러시아 미술사의 시작은 18세기부터 시작됩니다. 갑작스럽게 러시아가 유럽국가들의 반열에서 인정을 받고자 , 자신들도 좀 더 가치있는 그림과 예술에 눈을 돌립니다. 그리하여 이태리 , 프랑스의 미술을 배우고 유학을 권장합니다. 뻬쩨르부르그(당시 러시아 수도)에는 "왕립 미술학교"를 세워 , 귀족 집안의 자녀들에게 유럽에서 오신 교수님들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니 그 어디에도 러시아적인 , 러시아만의 그림은 찾아 보기 힘듭니다.

- 이동파 화가-
19세기 중반에 걸쳐, 왕립 미술학교의 졸업생 14명이 "졸업 작품의 테마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자, 학교에서는 이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14명의 학생들은 단체로 자퇴서를 내고, 극동지역부터 시베리아, 모스크바 등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자신들의 작품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 더이상 그림은 지배계층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농민들도 그림을 감상하고 평가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동파 화가들의 작품 전시회는 추운 겨울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이제는 유럽의 풍경화보다는 , 러시아의 자작나무를 그리는 풍경, 유럽 사람들의 생활 모습보다는 , 러시아 사람들의 삶을 그리고 , 당시 정치적 이념에 불만을 풍자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미술계의 사람들은 누구도 이동파 화가를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계적인 미술가로써 인정을 받을 수 있고, 러시아 각지를 돌으며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을 들여다보면 , 당시의 뜨레찌야 꼬프가 나옵니다. 처음에 저는 단순히 ' 돈 많은 상인이니 , 그림을 취미로 모았나보다' 라고 생각했으나, 이 사람에 대해서 배우고, 알아갈수록 저 자신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미완성작품도 작품이다-
이동파 화가중에 "이바노프" 화가가 있습니다. "이바노프"의 대표작으로는 " 예수 그리스도의 민중에게 나타나심" 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이 보통 2층 건물만한 높이여서, 작품도 상당히 크고, 화가가 20년동안 그렸지만 안타갑게도 미완성 작품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 작품이 미완성 작품이라고 맞추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의 피부색, 눈동자부터 이 사람이 나타내고자 하는 표현법이 너무나 섬세하게 잘 나타나있기 때문입니다. 이바노프의 테마는 성경 이야기 였습니다. 정교회 기도교적 사상으로 국민들에게 신앙을 통해 삶을 극복하는 힘을 불어넣어 주고자 했습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800 여점의 작은 습작들을 소장한 방이 따로 있습니다. 미술관 내에 "이바노프" 방을 갈때면 , 하나의 작품을 위해 20년동안 화가가 끊임없이 그리고 노력할때, 비록 완성되지 못하였지만 후세 사람들은 그 그림에 박수를 보낼수 있다는 것, 진정 '미완성 작품도 작품이구나' 하는 깨우침을 줍니다. 습작된 그림들을 통해 볼수 있는 것, 정말 사람이 살아가는 삶을 배우게 해줍니다. 오늘의 작은 실천과 노력이 내일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봅니다.

-사람의 잠재력을 보는 눈-
뜨레찌아꼬프는 이바노프의 "예수그리스도의 민중에게 나타나심" 이라는 작품을 한번도 보지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바노프가 뜨레찌야꼬프를 찾아가 말 합니다." 성경을 주제로 하나의 작품을 그리고 싶습니다. 제목은 이러하고 ,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뜨레찌야꼬프는 이바노프의 작품을 보지도 못 했지만, 그 사람에게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이바노프의 말 한마디에, 뜨레찌아꼬프는 앞으로 그릴 그림을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 미리 샀다고 합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그림을 , 단지 이제부터 그릴 것이라는 그 사람의 잠재력만 믿고 , 그 그림의 값을 후하게 쳐서 지불합니다.

뜨레찌야꼬프는 늘 자신을 "미술 애호가" 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화가들의 일반적인 평가는 " 뜨레찌야꼬프에게는 전문가 이상의 안목이 있다" 는 것 이었습니다.
뜨레찌야꼬프는 아바노프 외에도 많은 화가들을 유학 보내고, 후원하고, 양성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사진설명: 뜨레찌야코프 미술관에 전시된 페도또프 작품으로 제목은 소령의 구혼)
 
-프로와 아마추어-
"페도또프" 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이사람은 25세가 넘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장교 출신으로 , 이전에도 주변의 병장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었지만 그림이 너무 좋은 나머지 , 화가의 길에 접어들기로 결심을 합니다.
당시 러시아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브률로프" 화가를 찾아가서 , "선생님, 제가 그림을 배배우고 싶은데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브률로프"는 말합니다." 당신은 이미 너무 늦었소."... 자신이 찾아가 조언을 구한 사람에게 들은 한마디는 , 너무 늦었다 입니다.

그 후로 8년이 흐릅니다. 그동안 페도또프는 혼자서 남몰래 끊임없이 준비를 해서, 유화를 통해 풍자 그림을 많이 그리고,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8년후 페도또프의 그림이 다른 작품전시회에 출전하자 , 브률로프가 말 합니다. " 당신의 그림은 이미 내가 수십년동안 쌓아온 실력을 능가하오. 당신은 꿈을 이루웠군요." 브률로프는 당시에 , 귀족 집안 사람들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6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만, 그림을 그려줄 수 있는 당시 이태리에서도 명성을 떨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전문가에게 " 당신은 나를 이미 능가하오" 라는 평가, 그 이상의 찬사는 없을 것 입니다.

폐도또프는 유화를 사진기법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소령의 구혼"(사진설명 참조이라는 작품은 , 당시에 상인계층이었던 한 집안에 딸을 , 돈 때문에 나이 많은 소령에게 시집을 보내야 하는 사연을 담은 작품입니다. 돈 때문에, 당시에 20대 초반의 젊은 아가씨가, 60대가 넘는 할아버지에게 시집가는 일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모순들을 그림으 통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비판했던 풍자의 대표 화가 폐도또프는 아파추어로써 시작했지만 , 프로로써의 인생을 평가받게 됩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분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사람은 모든일에 아마추어 정신과 프로 근성이 필요하다." 아마추어 정신은 그 분야를 사랑하는, 자원해서 하고싶어하는 마음과 프로 근성은 프로답게 수준급으로 할 수 있는 실력을 말하는 것이겠죠?.

오늘 짧게나마 러시아 미술사를 돌아보았는데 , 역사라는 것이 결국 사람이 살았던 이야기 잖아요. 과거의 인물들은 자신이 하나를 실천함으로써 , 후대에 이름을 남기고 , 공헌을 했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개인주의","이기주의" 적인 생각과 성향으로 삶을 바라보고 살아가면서 , 더 중요한 것들을 잃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을 해봅니다. 앞으로 몇십년후, 몇 백년후.. 과연 우리는 죽어서 어떤 분야에 ,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요

(글/ 2003년 MBC 모스크바 통신원 시절 작성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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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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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2003년 12월 12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 필자는 왼쪽으로 보이는 바실리사원, 오른쪽에 크렘린 성벽과 레닌묘를 등지고 있다.)


모스크바의 심장부인 붉은 광장을 연상하면 대부분 빨간색을 떠올립니다. 막상 붉은 광장에 처음 오는 한국 사람들의 첫마디는 “에이, 붉은 구석이 하나도 없네?” 입니다.
고대 러시아어에 “붉다”(크라스늬)는 단어의 뜻은 “ 아름답다”(크라시븨) 라는 의미로 사용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아름다운 광장” 이라고 불렀지만, 후대의 사람들이 “붉다” 라는 말의 어원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붉은 광장”이 되어진 것이죠.
2차 세계대전 후 1945년 5월 9일 , 당당히 독일군을 이기고 전승 기념식과 축제를 열었던 곳도 역시, 붉은 광장입니다. 붉은 광장의 넓이는 73000km2 에 이릅니다.

넓은 붉은 광장에 빼놓을 수 없는 것! 바로 바실리 사원이지요. (*아래 사진 참조) 바실리 사원은 이반대제가 카잔 칸을 점령하면서 기념으로 1550년 경에 건축된 사원입니다. 당시 이반대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수도사 “바실리” 의 이름을 따서 바실리 사원으로 지었습니다. 바실리 사원은 보기만 해도, 동화에 나라에 온 것 같이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당시 꽃이나 식물들의 천연 자연의 색상을 이용해 , 사원의 돔을 칠했다고 합니다.

당시 사원을 지은 건축가에게 이반 대제가 물었습니다. “자네, 이렇게 아름다운 사원을 또 지으라면 지을 수 있겠는가?” . 건축가가 대답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반 대제는 건축가의 “네” 라는 대답 한마디에 , 다시는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다른 곳에서 지으면 안된다며, 두 눈을 뽑아버렸다고 합니다. (역사책에도 나오는 사실입니다~!!!)

붉은 광장은 크레믈린과도 붙어 있습니다. 크레믈린 궁, 미국의 백악관도 같은 곳이죠?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왕가가 살았던 궁전이었습니다. 크레믈린은 높은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좀더 정확한 발음은 “ 크렘린” 입니다. (러시아에서는 크레믈린 이라는 말을 못 알아 듣지요.) 많은 사람들이 붉은 광장과 크레믈을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붉은 광장을 다녀오고, “나는 크렘린까지 다 갔다.”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지요.

크렘린의 역사는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147 년 유리 돌고루끼 라는 공에 의해서 모스크바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모스크바 도시가 세워질 당시 , 이곳은 침엽수로만 가득했습니다. 그 침엽수를 모두 깎고, 목조 건물로 , 목조 벽으로 지은 건물이 바로 크레믈 이지요. 크레믈은 러시아어로 “성벽” 을 뜻합니다. 마을 단위를 형성하고 생활하던 사람들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건축 양식을 석조건물로 바꾸면서, 오늘날의 크렘린은 16~18 세기에 모습을 지켜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크렘린은 총 20개의 망루로 둘러 쌓여져 있습니다. 그 안에 영빈관 , 박물관, 사원, 수도원, 공원 등 다양한 건물들이 있고, 세계 최대의 종과 대포가 있습니다. 20개의 탑은 저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성모 승천 탑”, “삼위 일체탑” 등.. 모두 기독교 성화에서 나온 탑이지요. 공산주의 시절 전까지는 모두 그 탑마다 성화를 걸어놓고, 성화의 이름에 따라 탑의 명칭을 정했는데, 공산주의를 택하면서 종교를 인정할 수 없자 성화를 모두 떼어냈습니다. 그래도
그 명칭은 아직도 그대로 불리어 집니다

크레믈린 19탑은 성화에서 명칭을 따왔다면, 유일한 하나 바로 “ 보로삐츠카야 바쉬냐” 라는 침엽수의 어원을 두고 있는 탑이 있습니다. 실제로 매일 같이 푸틴 대통령과 , 역대 러시아 대통령들이 출퇴근을 했었는데요, 이 탑의 이름이 다른 이유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크렘린의 역사가 시작됐고, (침엽수로만 가득했었다고 했었죠?) 크렘린이 규모를 확장해 나가는 것도 항상 이 탑을 기준으로 했었습니다.

크렘린에서 살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구가 증가되고, 후에는 크렘린 궁 내에 있던 사람들이 성 밖으로 쫓겨나 , 지금의 붉은 광장 주변에 목조 건물들을 짓게 되면서 상인들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너무나 크렘린 주변이 지저분하고 , 복잡해지자 16세기의 이반 대제가 “모든 건물을 철거하라!” 는 명령을 내리고, 크렘린에 바실리사원부터 아름다운 건물들을 짓고 , 주변을 깨끗하게 정돈해 사람들이 모두 “ 아름다운 광장 ” 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반 대제는 실제로 성격이 번개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반 대제 보다는 이반 뇌제로 많이 불렀습니다. 바실리 사원의 건축가 두눈을 뽑아버렸다는 예만봐도 , 뇌제로 불릴만 하지요??


(글/ 2003년 MBC 모스크바 통신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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