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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1일자 중앙일보


브레이빅, 십자군 전쟁 ‘사자왕’ 리처드 1세가 우상

6개 키워드로 본 테러범 정신세계

노르웨이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25일 오슬로 시청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슬퍼하고 있다. [오슬로 AP=연합뉴스]

노르웨이 연쇄테러범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왼쪽)이 25일(현지시간) 오슬로 지방법원에서 구금심리가 끝난 뒤 이송되고 있다. [오슬로 AFP=연합뉴스]
‘평화의 낙원’ 노르웨이를 하루아침에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테러범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32). 그는 1m80㎝ 키에 금발 머리, 녹색 눈동자를 가진 손색없는 외모의 평범한 청년이었다. 한 살 때 부모가 이혼하긴 했지만 어머니와 양아버지 밑에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모르고 자랐다. 이런 청년이 연쇄테러로 무고한 76명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테러를 위해 쓴 돈은 31만7000유로(약 4억8300만원). 노르웨이를 패닉(공황)에 빠뜨린 브레이빅은 무엇 때문에 연쇄 테러를 저질렀을까. 현지 지방지 베르겐스 디텐드에 실린 브레이빅의 셀프 인터뷰 등을 통해 그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봤다.

#1. 네오나치즘(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극우인종주의)=브레이빅은 16세 때 진보당 청소년 조직에 가입한다. 그는 인터넷에 올린 ‘2083:유럽 독립 선언문’에 “진보당이 다문화주의에 반대하는 유일한 정당이기 때문에 끌렸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나치·파시스트·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판했지만 브레이빅은 이민 정책에 반대하고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브레이빅은 이 시점부터 사회적 문화와 정치에 관심을 쏟는다.

#2. 템플기사단(12세기 십자군 전쟁에서 이슬람과 맞서 싸운 조직)=20세 때 브레이빅은 민주당이 유럽의 이슬람화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다문화주의자들과의 40년 동안의 대화는 끝났고 재앙이 시작됐다”며 “유럽인들은 이제 마이너리티(소수집단)가 됐다”고 말했다. 브레이빅은 “다문화주의에 반대할 수 있는 대안을 찾고 싶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며 “이때부터 (테러)계획을 세우게 됐다”고 말한다.

#3. 유나바머=이번 노르웨이 연쇄테러는 유나바머 사건과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나바머는 미국 하버드대 출신의 교수 시어도르 카진스키가 현대 문명과 기술발전의 폐해가 인류를 파괴한다며 1978년부터 95년까지 총 16회에 걸쳐 우편물 연쇄폭탄 테러를 일으키며 미국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다. 문명 혐오주의자였던 카진스키는 주로 대학과 항공사에 있는 사람들에게 폭발물을 보냈다. 이 사건은 브레이빅이 다문화주의를 혐오하며 연쇄폭탄 테러를 저지르고, ‘2083:유럽 독립 선언문’ 내용이 카진스키가 발표했던 내용문 일부를 표절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게 됐다.

#4. 리처드 1세=제3차 십자군전쟁에서 여자와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무슬림(이슬람교도)을 무차별 살해해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용맹한 리처드 1세는 사자의 심장을 지녔다는 의미에서 ‘사자왕’으로 불렸고, 브레이빅은 사자왕을 닮고 싶어했다. 브레이빅은 “다문화주의자들이 무슬림 이민을 중단하고 모든 무슬림을 국외로 추방했다면 그들의 지난 잘못을 용서했을 것이다”며 “만약 그들이 2020년까지 항복을 거부한다면 그들을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말했다. 연쇄테러 범행 후에도 “(테러는) 잔인하지만 필요했다”고 말했던 브레이빅은 리처드 1세와 흡사하다.

#5. 콜 오브 듀티=브레이빅이 페이스북에 가장 즐기는 게임으로 꼽은 ‘콜 오브 듀티:모던 워페어 2’에 등장하는 ‘노 러시안(No Russian)’ 미션은 민간인 대량학살 장면이 등장한다. 게임 속 장면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민간인을 마구 조준 사격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진 희생자를 잔인하게 확인 사살한다. 게이머가 러시아의 극우 민족주의 테러조직 소속이라는 설정은 브레이빅이 다문화주의를 반대하는 극우 테러리스트라는 점과 매우 흡사하다. 브레이빅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러시아 총리를 꼽았다.

#6. 페미니즘=브레이빅은 여자친구가 없었다. 3년 전 연쇄 테러를 본격적으로 준비할 무렵엔 미국으로 건너가 이마와 코·턱 성형수술을 받았다. 브레이빅의 친구는 “나는 한 번도 브레이빅이 여자와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브레이빅은 연쇄 테러 전에도 성매매 여성과 잠자리를 하기 위해 2000유로를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우퇴야 섬에서 얼굴이 예쁜 여자아이부터 살해했다는 목격자 증언이 있다. 브레이빅의 정신적 세계엔 무슬림과 여성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담겨 있었다.

 채규만 성신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브레이빅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로 백인우월주의를 해치면 큰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는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있었다”며 “여성관계 문제도 개인의 문제로 보지 않고 사회적 문제로 보는 심리에서 나타난 행동이다”고 말했다.

임현주·민경원 기자




2011년 7월 26일자


테러범, 탄저균 살포도 구상

브레이빅 “유럽 반역자 처단” 주장


브룬틀란 전 총리
노르웨이 테러범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이 25일 법원 심리에서 “내가 소속된 단체에 두 개의 하부 조직이 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공범이 존재할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다. 노르웨이 경찰은 전날 그가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진술에 변화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은 사건 당일인 22일 브레이빅의 집에 머물고 있던 7명을 체포했다가 다음 날 모두 풀어줬다. 혐의점이 없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브레이빅은 테러 수시간 전 1500쪽에 이르는 ‘2083:유럽 독립 선언문’이라는 제목의 글을 시사토론 웹사이트(www.freak.no)에 올렸다. 이 글에서 그는 2002년 4월 영국 런던에서 ‘템플 기사단’을 재건하기 위한 모임에 참석했다고 주장했다. 템플 기사단은 십자군전쟁 때인 1118년 기독교 성지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된 조직이다. 브레이빅은 이 모임에 영국·프랑스·폴란드 등 8개국에서 9명이 참가했다고 기록했다. 노르웨이 경찰은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를 조사 중이다.

 그는 구속 여부를 결정하는 법원의 심리를 공개적으로 진행할 것으로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시민들의 공격이나 경찰 수사 내용의 유출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법원은 그를 후문으로 입장시켜 언론 접촉을 차단했다. 이에 따라 정식 재판 때까지 그의 모습은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판사는 그를 독방에 구금시켰다. 가족과 변호인 이외의 면회도 차단했다. 법원의 심리는 35분 동안 진행됐다.

 네덜란드 일간지 텔레그라프는 25일 브레이빅은 ‘유럽의 반역자’들을 처단할 탄저균의 분량을 계산한 바 있다고 보도했다. 브레이빅은 범행 전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에서 A급과 B급 반역자들을 죽이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탄저균이 필요한지를 계산했다” 고 적었다.

 브레이빅은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 “임무(연쇄 테러)를 실행하기 1주 전 두 명의 고급 성매매 여성을 고용하고 고급 프랑스 와인을 마시기 위해 2000유로(약 300만원)를 모았다”며 “임무를 앞두고 긴장을 풀기 위해 잠자리를 계획했다”고 밝혔다.

 그는 우퇴야 섬에서 덤덤탄(dumdum bullet)이란 특수 총알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25일(현지시간)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브레이빅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희생자를 내기 위해 인체 내부에 큰 손상을 입힐 수 있도록 고안된 덤덤탄을 사용했다. 덤덤탄은 다른 총알보다 무게가 가볍고 명중률이 높기 때문에 주로 동물을 사냥할 때 쓴다. 이 총알은 몸에 맞으면 인체 내에서 탄체가 쪼개지면서 납 알갱이가 퍼지는 게 특징이다. 총격 테러 희생자들을 치료하는 노르웨이 링그리켓 병원 콜린 풀레 박사는 “환자 16명의 몸에서 온전한 모양의 총알은 발견할 수 없었다”며 “특수 제작된 총알을 사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 후세인 카제미(19)는 덤덤탄 4발을 맞고도 살아남았다. 총격 테러로 숨진 희생자 중에는 메테마리트 왕세자비의 이복 오빠 트론드 베른첸도 포함되어 있었다.

빨간 옷 입고 법정 출두한 테러범 브레이빅

 브레이빅이 예쁜 여자아이부터 총격을 가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생존자의 증언을 인용해 “우퇴야 섬에 도착한 브레이빅은 사람들을 불러모은 뒤 가장 예쁜 여자부터 쐈다”고 보도했다. 브레이빅은 사건 전 자신의 일기장에 “친구들 모두 여자친구가 있는데 나만 없다”는 불평을 적어놨던 것으로 전해졌다.

 브레이빅은 노르웨이 경찰 조사에서 “그로 할렘 브룬틀란(72) 전 총리를 사살하려 했다”고 진술했다고 노르웨이 신문 아프텐포스텐이 보도했다. 그는 “브룬틀란 전 총리가 22일 우퇴야 섬을 방문하는 줄 알고 있었으나 이미 21일 청소년 캠프에서 연설을 마치고 떠난 뒤였다”고 말했다. ‘노르웨이의 어머니’로 불리는 브룬틀란 전 총리는 노르웨이 노동당 대표 출신으로 1981년과 86~96년에 총리를 세 차례 역임한 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지냈다.

 노르웨이 경찰은 이번 테러가 브레이빅의 단독 범행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으나 우퇴야 섬에서 브레이빅 이외에 또 한 명의 저격수가 있었다는 목격자 증언이 나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오슬로(노르웨이)=이상언 특파원, 임현주 기자





2011년 7월 25일자 중앙일보


범행 전 “나는 가장 거대한 괴물될 것” … 범행 뒤 “잔혹하지만 필요했다”

목격자들이 전한 참사 순간

아비규환의 테러 현장인 노르웨이 우퇴야 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끔찍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이들은 “현장에서 테러범의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그가 큰 소리를 지르고 웃었다”며 “그는 한 명 한 명씩 무자비하게 죽였으며, 사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정교하게 두 번씩 총알을 발사했다”고 말했다.

 AP·이타르타스 등 외신에 따르면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32)은 22일 오후 3시30분쯤(현지시간) 오슬로 정부청사 폭탄테러를 한 뒤 그곳에서 30㎞ 떨어진 우퇴야 섬으로 이동했다. 섬에는 집권 노동당 청소년 여름 캠프가 열리고 있었다. 참가자 대부분은 초·중·고·대학생들이었다. 테러범은 오후 4시50분쯤 경찰로 위장해 학생들을 불러모은 뒤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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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자 엘리사(15)는 “경찰관 차림의 젊은 남성이 건물로 들어왔고 갑자기 총성이 났다”며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 지르며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남성은 ‘아무 문제 없다, 걱정 말고 모두 가까이 오라’며 불러 모은 뒤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최대 노조인 자치구 일반 노조 조합장인 라세 크리스티안센은 “사고 당시 두 딸 모두 캠프 현장에 있었다”며 “둘 다 다른 장소에 있었는데 다행히 모두 무사하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크리스티안센은 두 딸에게서 들은 목격담을 대신 전했다. “큰딸(헬렌·21)은 수영을 잘하는 편이어서 총성을 듣자마자 2층 창문에서 뛰어내린 뒤 물가로 달렸다. 테러범은 헬렌을 포함해 몇 명이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건물 밖으로 나와 물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건물 안에서 희생된 사람은 대부분 10대 청소년들이었다. 고학년 학생들은 대부분 헤엄쳐서 달아났다 .”

 또 다른 생존자 프라블린 카우르는 자신의 블로그에 급박했던 상황을 상세히 증언했다. “총소리에 놀라 죽은 척하며 쓰러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테러범은 진짜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쓰러진 사람들 머리에 다시 총을 쐈다. 내 몸 위로 2명이 쓰러졌고, 주변에는 다른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다수의 목격자들은 “테러범이 오슬로 폭탄 공격 때문에 행사 안전을 돕기 위해 배치됐다고 속였다” 고 증언했다.

우퇴야 섬 인근 주민들은 총기 테러 당시 소식을 전해 듣고 구조활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퇴야 섬과 가까운 곳에 살던 캐스퍼 일로그(53)는 5.5m의 낚싯배를 띄웠다. 곧 현장에 도착한 그는 테러범을 피해 호수로 뛰어든 청소년들을 발견하고 배에 태웠다. 그는 세 번씩이나 우퇴야 섬을 왕복하며 모두 15명을 구조했다.

 이날 오슬로 시내에서 먼저 발생한 정부청사 인근 폭탄테러도 끔찍했다. BBC는 “정부청사 인근에서 ‘펑’하는 소리와 함께 폭탄테러가 발생하자 17층 높이의 총리 집무실 유리창이 모두 깨졌 다”고 보도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52) 총리는 이날 자택에서 업무를 보고 있어서 화를 면했다.

임현주 기자




2011년 7월 23일자 중앙일보

노르웨이 정부청사 밀집지역 대형폭발 … 10여 명 사상

석유부 청사 불길 … 총리는 청사에 없어 무사
‘아프간 파병 보복’ 알카에다 테러 가능성 무게

22일(현지시간) 노르웨이 오슬로 정부청사 밀집지역에서 테러로 의심되는 대형 폭발 사고가 발생해 옌스 스톨텐베르그 총리 집무실이 있는 건물이 크게 훼손됐다. 폭발로 화재가 발생하며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다. 현지 언론은 이날 폭발이 알카에다와 연계된 테러조직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오슬로 AP=뉴시스]

노벨 평화상을 시상하는 노르웨이에서 테러로 의심되는 대형 폭발 사고가 발생해 최소 2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다쳤다.

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22일 오후 3시30분(현지시간)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정부청사 밀집 지역에서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 이 지역에는 총리실 건물과 재무부·석유부 청사, 노르웨이 최대 타블로이드 신문 VG 건물 등이 있었다. 폭파 당시 옌스 스톨덴베르그(52) 총리는 총리실에 있지 않아 무사하다고 현지 공영 라디오 NPK가 전했다.

 폭파로 석유부 청사에서 불길이 타올랐으며, 주변 건물들의 유리창이 대부분 파손됐다. 라디오 노르웨이는 “사전에 건물에 설치된 폭탄이 폭발하면서 사고가 났다”며 “폭발음은 오슬로 시내 전체에 들릴 정도였다”고 보도했다. 오슬로 경찰은 건물 주변에 추가로 설치된 폭발물이 있을 것으로 보고 청사 주변 도로를 봉쇄하고 폭발물 제거 작업에 나섰다.

 로이터 통신은 “오슬로 시민들이 패닉에 빠졌다”며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을 하고 있지만 건물에 연기가 자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목격자들은 “‘펑’ 소리와 함께 건물 일부가 폭발했고 순식간에 거리는 자욱한 연기로 뒤덮였다”며 “주변 차량들도 크게 손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정확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현지 언론은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테러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인 노르웨이는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아프간에 파병하고 있고, 지난 3월 이후 나토의 리비아 공습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지난 5월 2일 오사마 빈 라덴 사망 이후 알카에다 최고지도자가 된 아이만 알자와히리는 2007년 “이슬람을 적대하는 전쟁에 참여한 노르웨이는 알카에다의 보복 대상”이라고 밝힌 바 있다. 노르웨이 신문은 2006년 초 이슬람을 창시한 예언자 무함마드를 테러리스트로 묘사한 덴마크 신문 만평을 다시 게재해 이슬람권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당시 시리아와 파키스탄에서는 노르웨이 대사관이 불타고 노르웨이 기업 사무실이 공격당했다.

임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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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갖고 장난해’ … 뿔난 푸틴

[중앙일보]입력 2011.07.18 00:05 / 수정 2011.07.18 01:00                             중앙일보 18일자 국제1면(14면)

‘독일이 본받을 만한 인물’
수상자 발표 하루만에 철회



블라디미르 푸틴(59·사진) 러시아 총리에게 상을 주려던 독일의 비영리단체가 국내외 반발에 밀려 시상 계획을 하루 만에 철회했다.

 러시아 국영통신 리아노보스티는 16일(현지시간) 독일의 비영리 단체 ‘베르크슈타트 도이칠란트’가 독일 통일을 기념해 ‘2011년 독일이 본받을 만한 인물’로 선정한 푸틴 등 4명의 후보에 대한 시상 계획을 모두 취소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푸틴은 전날까지 이 단체가 시상하는 콰드리가(Quadriga)상 수상자 명단에 있었다. 콰드리가는 독일 수도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 위에 세워진 4마리 말이 끄는 2륜 전차를 일컫는다. 수상자에게는 콰드리가를 작게 축소한 모형을 수여한다. 그러나 푸틴의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야당과 시민단체, 언론이 비난에 나섰고 결국 시상 계획이 철회됐다.

 이 단체는 매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을 기념해 혁신적인 아이디어나 개척 정신을 갖춘 인물이나 단체를 선정해 시상해 왔다. 푸틴은 러시아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고 독일·러시아 관계를 안정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이 단체의 이사회 멤버 일부마저 “푸틴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자유를 억압했다”며 “인권을 존중한 인물과 거리가 멀다”며 이사회를 탈퇴했다. 2009년 이 상을 탄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은 “만약 푸틴이 상을 받게 되면 내가 받은 상은 반납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반발은 결국 4명의 수상 후보자 전원에 대한 시상 계획을 철회시켰다.
 
 이에 대해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총리 공보실장은 “상당히 모순되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처음에 수상자를 결정한 뒤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을 때에도 절차상의 문제가 없다고 했다가 하루 만에 취소 결정을 내린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임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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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린, 인류 첫 우주비행 50돌 … 런던에 기념 동상

당시 영국여왕 접견을 기념
딸 가가리나 제막식에 참석

                                                                                                                  중앙일보 7월 16일자 기사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의 딸인 옐레나 가가리나가 14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우주 비행 50주년 기념으로 건립된 가가린 동상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런던 AP=연합뉴스]

옛 소련 우주인 유리 가가린(Yuri Gagarin·1934~68)의 동상이 영국 수도인 런던 한복판에 세워졌다. 50년 전인 1961년 세계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했던 인물이다.

15일 이타르 타스 통신에 따르면 14일(현지시간) 가가린의 딸인 옐레나 가가리나(52)가 참석한 가운데 런던 중심부 트래펄가 광장 인근의 영국문화원 본원 앞에서 가가린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유리 가가린은 1961년 4월 12일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상 300㎞까지 올라가서 지구 한 바퀴를 돌고 108분 만에 지상으로 귀환했다. 우주에 다녀온 뒤 영국을 공식 방문했던 가가린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만났다. 그 뒤 가가린은 68년 3월 27일 모스크바 근교 블라디미르주의 항공기지에서 훈련 중 비행기 추락으로 34년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모스크바 크렘린박물관 부관장을 맡고 있는 가가리나는 가가린의 우주 비행 50주년 기념행사와 가가린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만남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을 공식 방문했다.

그는 이타르 타스와의 인터뷰에서 “50년 전 아버지를 따뜻하게 맞아줬던 도시 런던에 아버지 동상을 세우게 돼서 영광”이라며 “미지의 세계를 향한 아버지의 우주 비행을 표현한 동상을 보니 기쁘다”고 말했다.

 런던에 세워진 동상은 84년 가가린의 50번째 생일을 기념해 모스크바 외곽에 세웠던 티타늄 동상의 복제품이다. 러시아 연방 우주청이 영국 의회에 선물하는 형식으로 런던에 세워졌다.

 3.5m 높이에 아연과 알루미늄 합금으로 제작된 이 동상은 지구를 감싼 뫼비우스 띠 위에 가가린이 두 팔을 벌리고 한 발을 앞으로 내딛는 모습을 하고 있다. 뫼비우스 띠는 가가린이 비행했던 우주 궤도를 상징한다.

이날 제막식에는 우주에서 최장 시간인 800일을 머문 기록을 갖고 있는 우주인 세르게이 크리칼료프(53·러시아)와 러시아 연방 우주청장 블라디미르 포프킨(54) 등이 참석했다.

임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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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부 김형수 선배가 찍어준 사진 *^^*

 


1986년 4월 25일 오전 1시 24분쯤 폭발했던 체르노빌 원전 4호기 앞.


 


프리퍄티 도시에서 취재를 하다가 빗물이 자꾸 떨어져 김형수 선배 모자를 빌려 썼다. 취재 내내 긴장한 표정.


 


체르노빌 취재를 마치고 방사능 오염도 측장하는 기계에서 검사를 받고 있다.

 



2011 체르노빌 보고서 기사 3편에 실린 안드레이 가족과 함께.


 



체르노빌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하리코프스키 지역 사람들 인터뷰. 비록 기사 내용에는 편집이 됐지만, 인터뷰에 응했던 아주머니(왼편)는 체르노빌 원전 폭발 당일이 본인 생일이었고, 당시 당직을 서고 있었다고 했다. 사고 후 곧바로 갑상선 암 수술을 했다며 정말 작은 목소리로 새소리처럼 가늘게 말했다. 사고 후 뼈가 쑤시고 여러가지 통증에 시달려 수술만 여러차례 했고,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추가 보상을 거부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중이라고 했다.

***

11일. 공릉력 인근에 위치한 원자력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귀국 후 출입처에 곧바로 배치되어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체르노빌 취재가 오래된 것 같이 느껴진다. 6박 7일간의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취재를 통해 기자로써 평생 잊지 못할 값진 경험을 했다. 무작정 택시타고 "하리코프스키 마을 가자"고해서 당황해 했던 택시기사 아저씨, 어려운 사정을 듣고 자신의 처남 안드레이를 소개시켜준 고마운 분도 잊지 못할 것이다.
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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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취재 사진 모음

 

 

 

 

 

 

 

 

 

 

 

 

 

 

 

 



체르노빌 원전을 취재하면서 작은 디지털 카메라에 담은 풍경이다. 취재를 도와준 니콜과 사진부 김형수 선배의 사진 촬영 됫모습 등을 찍었다. 프리퍄티 도시에서 올라갔던 호텔 아래 풍경, 방문했던 학교와 교실의 출석부... 정말 참담함 그 자체였다.
유치원에는 인형 옆에 방독면이 항상 놓여있었고, 건물마다 비가 새서 어깨에 떨어진곤 했다 가끔 방사능 측정기가 울려서 같은 지역이라도 조심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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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체르노빌 보고서-중앙일보 임현주 기자, 원전 재앙 25년 ‘죽음의 땅’ 가다 ③

"월급 5배 받고 원전 수습한 아버지 방사능 노출로 10년 만에 숨져”

원전 폭발 때 여섯 살이었던 안드레이가 체르노빌에서 가족과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보여주며 사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고 이후 그는 키예프로 이주해 결혼을 했지만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키예프=김형수 기자]
기자는 4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만난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체르노빌과 프리퍄티 이주민이 거주하는 하리코프스키 지역으로 갈 수 있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이주민들이 겪었던 실상을 취재하고 싶다”고 하자 택시기사는 자신의 처남인 안드레이 리세녹(31)을 소개해줬다. 사고를 경험한 상당수의 주민들이 “더 이상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취재에 응하지 않은 터였다. 안드레이는 사고 때 여섯 살에 불과했지만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프리퍄티에서 빵을 팔았고, 아버지는 체르노빌 우유공장에서 일했다. 사고 당일 그는 옆집 아저씨 도움으로 체르노빌에서 90㎞ 떨어진 할머니 집으로 피신했다. “집 문을 나서는데 하늘엔 헬리콥터가, 도로에는 수십 대의 소방차들이 원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부모님은 사고 발생 후 2주가 지나서야 할머니 댁으로 왔다. 체르노빌 원전 가동을 당장 중단할 수 없기 때문에 원전 근로자들을 위해서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안드레이는 “사고가 난 이후 가족들이 함께 지내고 있을 때 체르노빌 원전 책임자가 아버지를 다시 불러들였다”고 말했다. 당시의 월급보다 5배나 많은 550루블을 받는 조건으로 원전에서 근무했다. 2주를 일하고, 2주는 쉬는 조건이었지만 결국 방사능에 노출돼 10년 만에 숨졌다. 안드레이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정부에서 확보한 요오드가 모자라자 15세 이상 성인들에게는 와인과 메밀 섭취를 권장했다”고 했다.

 안드레이는 어린 시절 프리퍄티 강에서 아버지와 낚시하던 사진을 꺼내 들었다. “원전 사고로 행복했던 우리 가족의 삶은 한순간에 파괴됐다”고 말했다. 어머니도 지난해 돌아가셨다.

안드레이는 “사고 직후 사람들은 모두 1년 안에 죽는다, 2년 안에 죽는다며 괴로움에 시달렸다”고 했다. “수술을 받고 회복한 사람도 있지만, 정신적 충격을 견디지 못해 보드카만 마시다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도 많았다”고 설명했다.



임현주 기자
 7년 전 결혼한 안드레이는 “체르노빌 주민 자녀들은 고등학교까진 학비가 없고, 대학 등록금도 50% 지원된다”며 “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의료비 지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무릎 통증과 암 등 사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웃이 많다”며 “정부에서 추가 보상을 거부해 소송 중인 사람도 많다”고 했다.

  체르노빌 박물관 과학 담당 이사 안나 체르니코바는 “한국도 일본·중국 등 인접 국가의 예기치 못한 사고로 방사능 피해 국가가 될 위험이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요오드 등 방사능 치료 물자를 충분히 확보하는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키예프=임현주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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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4일자 중앙일보 3면

인구 5만 ‘천재들 도시’가 유령의 도시로

중앙일보 임현주 기자, 체르노빌 원전 재앙 25년 ‘죽음의 땅’ 가다 ②



체르노빌에서 3㎞ 떨어진 도시 프리퍄티의 한 건물에서 내려다본 시내 전경. 1986년 원전 사고 직후 주민들이 피난가면서 이곳은 폐허가 됐다. 발전소 직원 니콜리아 파닌(오른쪽)은 프리퍄티를 가리키며 “유령의 도시”라고 말했다. [프리퍄티=김형수 기자]

3일 오전(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프리퍄티.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북쪽으로 3㎞ 떨어진 곳이다. 체르노빌 동편의 강 이름을 따 1970년 지어진 계획도시다. 체르노빌 원전에서 근무하던 직원과 가족 5만여 명이 살았으며 평균 거주 연령은 26세였다. 소련 체제 때 공산당이 젊은 천재 과학자들을 이곳에 강제 이주시켰다.

 체르노빌에서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자 호텔과 학교·유치원 등 폐허가 된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첫 인상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중앙 광장에 있는 8층짜리 호텔로 올라갔다.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파트 단지 뒤에는 이 마을을 유령의 도시로 전락시킨 원전 4호기가 자그맣게 보였다. 계단마다 당시 충격으로 깨진 유리 조각들이 깔려 있었고, 객실의 옷장은 유리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삐거덕거렸다. 천장에 고여 있던 빗물이 어깨 위로 떨어졌다.

 호텔 앞 문화예술극장에는 1986년 사고 당시 상연 중이던 작품의 포스터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수퍼마켓에는 버려진 카트가, 수영장 위에는 사고 발생일인 86년 4월 26일 오전 1시26분에 멈춰선 시계가 그대로 있었다. 프리퍄티는 사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의 방사능 피폭 수준은 3만3000마이크로시버트(μ㏜)였다.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에 따르면 방사선 피폭량이 7000μ㏜ 이상이면 며칠 내 사망할 수 있다.

 당시 소련 정부는 원전사고 후 36시간 만에 버스 1200대를 동원해 3시간 동안 이곳 주민들을 모두 외곽으로 대피시켰다. 폐허가 된 학교 교실에는 출석부와 학생 25명의 시험 점수, 과목별 과제를 기록한 노트가 널브러져 있었다.

 유치원에는 곳곳에 인형과 방독면이 굴러다녔다. 버려진 사물함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실내화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건물 안쪽엔 여러 방에 어른 키 반만 한 침대들이 20~30개씩 들어서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빅토르 이바노프(37)는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방독면 착용법을 배웠지만 막상 원전 폭발 후 방사능 차단에는 도움이 안 됐다”며 “사고 직후 정부는 황급히 15세 미만 아이들을 모두 우크라이나 남쪽 오데사·크림 지역으로 대피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지도상으로 키예프에서 체르노빌까지 직선 거리는 70㎞밖에 안 된다”며 “당시 체르노빌과 키예프 인근 15세 미만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모두 부모와 3개월 이상 떨어져 지내야 했다”고 덧붙였다. 프리퍄티를 함께 둘러본 비상대책위 관계자는 “이곳은 원전사고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완벽한 도시였다. 하지만 한순간의 실수가 국가 최고 인재들과 가족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혔고,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을 보게 했다”고 설명했다.


임현주 기자


 체르노빌 통제구역 30㎞ 인근에는 현재 원주민 수백 명이 돌아와 생활하고 있지만 프리퍄티는 지금도 방사능 수치가 높아 출입 시 비상대책위의 별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 2시간 이상 체류할 수도 없다. 발전소에 근무하는 니콜라이 파닌은 프리퍄티를 “유령의 도시”라고 말했다.

프리퍄티(우크라이나)=임현주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프리퍄티=우크라이나 북부에 있는 도시로 소련 정부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와 함께 계획해 건설했다. 체르노빌 원전 직원과 가족 5만여 명이 살았지만 1986년 사고 이후 유령도시가 됐다. 대피 명령 후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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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2일 중앙일보 1면 기사

2011 체르노빌 보고서 … 중앙일보 임현주 기자, 원전 재앙 25년 ‘죽음의 땅’을 가다

우릴 태운 운전사는 내리지 않았다
방사능보다 더 무서운 ‘불신의 공포’


1986년 4월 최악의 원자력 사고가 일어났던 체르노빌 원전 원자로 4호기. 26일로 사고 발생 25년을 맞는 이곳은 지붕과 측면이 콘크리트 방호벽과 철재 보강재로 덧씌워져 있다. 취재진이 방사능 측정기로 재본 결과 5.22μ㏜로 X선 촬영 때(30~50μ㏜)보다 낮지만 장기간 노출될 경우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저주받은 땅이었다. 1일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체르노빌로 향하는 차창 밖으로 믿기 힘든 풍경이 다가왔다. 차로 두 시간 정도 달렸을까. 하얀색 자작나무 가지가 붉은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에는 축구공처럼 생긴 작은 가지들이 듬성듬성 매달려 있었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30㎞ 떨어진 주민통제소를 지났다. 통제소 안쪽은 지난 25년간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까닭에 허가를 받은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 통제소의 ‘스톱(Stop·멈춤)’ 표지판에서 1986년 4월 26일의 원전 폭발 사고가 얼마나 깊은 후유증을 남겼는지 느껴졌다. 하지만 신원조회를 하는 현지 경찰에게선 긴장감이 엿보이지 않았다. 안전불감증은 15년 전 중앙일보가 찾았을 때(1996년 4월 25일자 보도)와 달라진 게 없었다.


임현주 기자

 원전을 10㎞ 남겨둔 지점부터 방사능 측정기 수치가 널 뛰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25년 전 폭발음과 함께 전 세계를 악몽으로 몰아넣었던 원자로 4호기가 몇 분 후 모습을 드러냈다. 지붕과 측면을 콘크리트 방호벽과 철제 보강재 등으로 덮어 씌운,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를 통치하던 소련 정부는 사고 7개월 뒤에야 4호기 잔해와 오염물질을 콘크리트로 덮는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원자로 안에는 아직도 150t 이상의 방사성물질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자 일행은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현지인 운전사 유리 타바셴코(44)는 “아내는 내가 이 근처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펄쩍 뛸 것”이라며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체르노빌 원전에서 30㎞ 지점에 있는 통제소에서 현지 경찰이 방사능 검사를 하고 있다. [체르노빌=김형수 기자]
원전 10㎞부터 측정기 숫자 요동

방사능, 50배 이상으로 치솟았다


방사능 측정기를 꺼내 보니 시간당 5~11마이크로시버트(μ㏜)로 측정됐다. 서울과 비슷한 수치(0.2~0.3μ㏜)를 보였던 통제소보다 많게는 50배 이상 증가한 것이었다. 벽면 틈 사이로 흘러나온 듯한 붉은 녹물 흔적도 보였다.

 통제지역 관리청 측의 공식 입장은 “일부 방사성 물질이 외부로 방출되긴 하지만 극히 소량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관리청 측은 “앞으로 15년은 더 버틸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지 주민은 이 같은 발표를 믿지 않고 있다. 당시 서둘러 만들었던 콘크리트 방호벽에 균열이 생기면서 대기 중으로 상당량의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키예프 주민 표트르 레시토프(39)는 “체르노빌의 방사능 수치가 떨어졌다고 하지만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은 대부분 70세 이상 된 노인들뿐”이라며 “정부에서 안전하다고 주장해도 믿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여성들이 출산을 않는 것도 이런 우려 때문”이라고 했다.

 주민들의 ‘방사능 공포’는 뿌리 깊은 정부 불신에서 비롯됐다. 원자로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조작 실수로 폭발 사고가 일어나자 구 소련은 정보 차단에 급급했다. 사고 후 이틀 뒤에야 TV 방송을 통해 사고 사실을 발표했다. 사고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약 1200㎞ 떨어진 스웨덴 포스막 원자력발전소에서 전례 없던 방사능이 검출돼 소련에 공식 해명을 요구하자 마지 못해 밝힌 것이다.

 사고 당시 2분 만에 현장에 도착해 화재 진압에 나섰던 300여 명의 소방대원들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숨져갔다. 발전소에서 근무하는 니콜라이 파닌은 “정부가 방사능에 대한 위험을 전혀 알리지 않아 별도의 안전장비 없이 화재를 진압하다 흘러나온 방사성 물질에 노출돼 한 명씩 죽어갔다”고 했다. 철저한 정보 폐쇄로 유지됐던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재앙을 키운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는 주민들의 정부 불신으로, 제2, 제3의 방사능 공포로 이어지고 있다. 방사능이란 ‘괴물’과 싸우는 데 있어 정부의 정보 공유 노력과 국민의 신뢰가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준다.

 현재 우크라이나 정부는 원자로 4호기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유럽연합(EU) 등의 지원을 받아 콘크리트 방호벽 위에 철제 방호벽을 덧씌우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현지 주민들은 작업 과정에서 또다시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빅토르 페트렌코(64)는 “후쿠시마 원전 보도를 접할 때마다 체르노빌 악몽이 떠오른다” 고 말했다.

체르노빌(우크라이나)에서 글=임현주,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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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1월 11일자 한국일보
유리 차이카 러 검찰총장 "검찰, 정치권에 흔들려선 안돼"
차이카 총장 방한

임현주기자 korearu@hk.co.kr
한국을 방문한 유리 차이카 러시아 검찰총장은 최근 정치권의 견제를 받고 있는 김준규 총장에게“정치인이 연루된 사건이라도 흔들리지 말라”고 말했다.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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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정치권의 눈치를 보면 돼나요. 정치인이 연루된 사건이라도 검찰은 흔들리면 안됩니다."

유리 차이카(59ㆍ사진) 러시아 검찰총장은 "마피아가 많은 러시아에도 정치인들이 검찰 수사에 왈가왈부하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G20 정상회담 참석차 방한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순방에 동행한 차이카 총장은 10일 대검찰청에서 '한ㆍ러 상호협력 프로그램'에 대한 회담을 마치고, 김준규 검찰총장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하바로프스크 극동지역 출신으로 1999년부터 2006년까지 러시아 연방 법무부 장관을 지낸 차이카 총장은 한ㆍ러 사법 공조 시스템 구축을 위해 힘쓴 인물로 유명하다. 참여정부 시절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2003년) 법무협력 협정을 체결했고, 정상명 검찰총장(2007년) 임기 때는 검찰업무 협력협정을 맺어 경제범죄를 비롯한 마약, 첨단기술범죄 등의 정보를 교환해 양국은 지금까지 총 60여건의 수사 공조 성과를 거뒀다.

차이카 총장은 "이젠 양국 검찰이 범죄인인도조약을 체결하는 등 보다 구체적인 수사공조를 실천으로 옮길 단계"라며 "범죄 유형이 다양해진 만큼, 폭 넓은 정보 공유와 수사 교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한국 검찰이 기업의 부패 수사를 강화하면서 정치권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듣고 상당히 놀랐다"며 "러시아는 정치권에서 검찰에게 압력을 행사한 전례가 없었지만, 검찰이 외부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 검찰청 내에 부패전담 기구를 별도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또 "예전에 검찰이 마피아 관련 수사를 지휘하다 피살된 사례가 있었다"며 "얼마 전부터는 마피아나 범죄집단으로부터 검찰이 신변을 보호받을 수 있는 전문 부서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차이카 총장은 이날 오후 김준규 총장과 청와대를 공식 방문해 한ㆍ러 정상회담 직후 '한ㆍ러 검찰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2개년 상호협력 프로그램'을 체결했다. 프로그램에 따르면 양국 검찰은 2011년 3월 모스크바에서 '한ㆍ러 검찰 조직의 기능 및 역할'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6월엔 서울에서 '형사사법공조와 범죄인인도 등 국제협력'에 관해 논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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