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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 사는 우리나라 동포들은 '재미교포', '재일교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유독 '고려인'이라고 칭합니다. 중국의 '조선족'보다는 나은 표현이니까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요?


예전에 러시아에서 만났던 한 고려인 여성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한국 사람들은 우리와 대화 한번 나눠보지 않았으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면서 사람을 낮게 보고, 그렇게 부르냐. 왜 국가의 파워에 따라 어디는 ‘교포’ 어디는 ‘인’, ‘족’이라고 부는 것이냐”.


그 얘길 듣는데 참 부끄러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본의 논리, 경제의 힘에 따라서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도, 부르는 호칭도, 대하는 태도도 모두 달라지기 때문이죠. 어쩌면 그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해외 동포들을 한민족으로 끌어안지 못하는 것일수 있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오늘은 2001년 11월 모스크바 교민신문에 썼던 글을 하나 찾아서 올려봅니다.


"고려인, 그들은 왜 러시아로 왔는가?"

러시아 역사책에 보면 1860년 연해주 지역에 한인 13가구가 최초로 기록되어있다. 그 후로 한인들은 연해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1862년에 한반도 북부에 대 기근으로 인한 이주가 급증하면서 이민자 수는 1만 명 가까이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우리나라를 떠나야만 했나. 그 당시 사람들은 가난과 기근, 국가의 어지러운 사정으로 인해 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1932년 연해주에는 한인 학교가 380개 설립됐고, 6종류의 잡지, 7개의 신문사가 활동할 정도로 한인들의 수는 늘어만 갔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언제부터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톡 등 우리나라 인접 지역이 러시아 영토가 된 것일까.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1821년 알레스카 지방과 북미 대륙에서 미국과 영국이 충돌함으로써 러시아 팽창주의가 중단된다. 이때부터 러시아의 동방 경략이 시작됐다.

청나라는 연해 1858년의 아이훈 조약에서 흑룡 지방을 러시아 영토로 인정했고, 1860년 북경 조약에서는 연해주 및 우쑤리 지방마저 러시아령으로 인정했다.

러시아인과 한인이 문제가 생긴 곳은 바로 연해주와 우쑤리스크 지방. 그러므로 연해주 지역에 처음 한인 13가구는 당시 우리나라 말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 당시 조선의 배경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지배 계층들은 그들의 정치적 불우함을 농민들에게 분풀이하듯 했다.

농어민들은 지배 계층에 대한 상대적 빈곤감의 증폭과 좌절감으로 흔들렸고, 농민들에 대한 정책적인 배려가 없음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극심한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정치는 늘 불안과 혼란이 있었다. 붕당과 척족들의 세도정치와 부패, 계속되는 민란과 병란으로 변경지대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기에 농민들은 자구책을 찾지 않으면 안됐다.

그래서 그들은 황폐해진 산천을 떠나 안주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타국을 동경하고 국경을 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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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1860년경 국경이란게 막 생길 무렵, 연해주에서 만난 러시아 인들이 한인을 보고 "당신들 왜 러시아까지 왔소?"라고 묻자, 그 한인들이 "여기가 고려시대때는 우리나라 땅이었다"고 답해서 '고려인'이라고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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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한국학 대부 미하일 박 별세
 
러시아 내 한국학의 대부이자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미하일 박(한국명 박준호) 모스크바 국립대 공훈교수가 지난 16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1918년 6월21일 연해주 하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36년 모스크바 국립대에 입학하면서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우크라이나 국립대 및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역사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강의하면서 한국학 전문가를 육성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1949년 모스크바대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삼국사기와 씨름을 시작해 10년 만에 삼국사기 신라 본기를 처음으로 러시아어로 번역한 데 이어 1980년대 초 백제 본기를 번역했다. 2002년에는 85세의 고령으로 삼국사기 전본을 완역했다. 또 이순신 장군 연구에도 남다른 관심을 두면서 2004년에는 ‘임진왜란에 관한 러시아 역사가들의 서술’이란 제목의 연구자료를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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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인터넷 실명제’ 거부한 구글코리아 이원진 대표

“인터넷 실명제는 인터넷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을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제도다. 힘 없는 사람이 목소리를 내는 공간을 빼앗으면 인터넷의 순기능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15일 서울 강남에 위치한 구글코리아 본사에서 만난 이원진 구글코리아 대표이사(42)는 단호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표현의 자유는 사용자를 위해선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라는 얘기였다.

구글코리아가 지난 9일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에 따라 의무화된 실명제를 거부하고 유튜브 한국 사이트에는 동영상이나 댓글 등의 게시물을 올릴 수 없도록 한 것도 그 원칙에 입각한 당연한 결정이었다.

구글코리아의 실명제 거부는 미국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가 “유튜브가 한국 정부와 ‘고양이와 쥐 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비유하는 등 국내외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논란을 제기했다.

이원진 대표는 “비즈니스 측면에서 결정했다면 실명제를 도입하는 게 맞지만 인터넷 이용자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제도였다”면서 “그동안 인터넷이 만들어 왔던 많은 장점들을 훼손시킬 수 있는 사안이어서 신중하게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실명제 도입을 안 한다고 발표한 뒤 업계 관계자들로부터 ‘한국 사업을 접으려고 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면서 “우리는 반대로 한국 시장이 중요하기 때문에 길게 보고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업자 입장에서는 정부의 정책이나 결정을 무조건 따르면 사업하기 편하다. 사실 웬만하면 (정부)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한다”면서 “하지만 구글은 사용자 위주로 결정한다는 원칙이 있고, 그 원칙을 깰 순 없었다”고 강조했다.

구글은 2007년 처음으로 한국에 지사를 설립했다. 직원은 150명이 전부다. 이제 겨우 3년차 회사로, 유튜브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15%를 차지하고 있는 구글코리아가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대표는 “네티즌이 있기에 인터넷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실명제를 거부한 뒤 게시판에 네티즌들의 응원 글이 쏟아져 나왔다. 내용을 읽으면서 표현의 자유야말로 사용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대표는 인터넷 실명제 도입으로 자칫 동영상 시장이 침체되진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서 우리가 얻은 것을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다”며 “인터넷에 바운더리(경계선)를 나누고, 사업을 규제의 틀로 묶기 보다는 인터넷 활성화를 위해 더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글은 포털 네이버나 다음처럼 메인 화면에 광고를 하지 않는다.

이 대표는 “메인에 광고 넣고 배너광고 몇 개 달면 매출을 확 끌어 올리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러나 돈을 좇다보면 사용자(네티즌)가 떠난다”면서 “메인 화면에서 사용자들이 가장 빨리, 많은 정보를 검색할 수 있도록 연구하다 보면 매출은 자연히 따라 온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많은 리스크(위험부담)가 있겠지만 조급해하지 않겠다”면서 “검색의 차별화를 통해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검색되고 활성화된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글 임현주·사진 김정근기자 korearu@kyunghyang.com>
  2009년 4월 16일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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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러시아 모스크바 시내에 위치한 구세주사원/흐람 흐리스따 스빠시쩰랴. 러시아 정교회의 상지이었던 이 사원을 스탈린은 "종교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폭파시켰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된 후 1998년 러시아 국민들이 모스크바 수도 850주년을 기념해 성금을 모아 사원을 옛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중앙의 큰 돔은 안에는 하나님이, 4면에 있는 작음 돔 안쪽 천장에는 4복음서에 나오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그려져 있고, 돔은 지붕은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 졌다.)

러시아 인구는 약 1억 5천만명정도 됩니다. 러시아의 국교는 정교회로 인구의 약 65%가 정교회를 믿고, 인구 6분의 1이 이슬람을믿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988년 그리스 정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였고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면서 부터 12세기 이후에 '러시아 정교회'로 재 탄생을 합니다.

정교회가 가톨릭, 개신교와 다른 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의 성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콘(성화)이 있어야지만 기도를 합니다. 예배(미사) 시간 내내 서서 예식을 거행하며, 유럽처럼 파이프오르간으로 연주가 없이 사원의 각 돔이 파이프 오르간처럼 노래를 아름답게 울릴 수 있도록 해주죠.
러시아 사원 안에 들어가보면 성화나 프레스코화(벽화)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기도하는 성인 앞에서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합니다.

19일자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에 부활절 관련 기사가 보도됐네요.
러시아 정교회의 가장 큰 기념일인 부활절이 다가왔다는 제목입니다.
19일 밤부터 모스크바 '그리스도 사원'에서는 밤새 예배(미사)가 진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정교회 교주는 국민들에게 부활절의 기쁨을 모든 이들과 나누라고 축복하고, 청년들의 일자리를 위해서 기도했다는 내용입니다.

Наступил главный православный праздник - Пасха Христова


19.04.2009, 00.00



МОСКВА, 19 апреля. /ИТАР-ТАСС/. В Россию пришло Светлое Христово Воскресение - самый главный православный праздник. В пасхальном послании патриарх Московский и всея Руси Кирилл пожелал соотечественникам, чтобы сердца людей были наполнены христианской радостью, превышающей всякие земные невзгоды. "Воскресение Христово даровало нам подлинную свободу и наполнило бытие человека смыслом. Самое главное - оно открыло путь в Жизнь Вечную всякому верующему во Христа и пребывающему в Церкви", - говорится в послании.

Предстоятель Церкви обратил особые слова к молодежи, "которой предлежит широкое поле трудов, дерзаний и свершений". "Вам предстоит созидать будущее нашего народа и нашей Церкви. Пусть же силы, таланты, способности, дарованные вам от Господа, будут использованы на благо ближних для свершения святой воли Божией", - призвал патриарх. Он уделил внимание и переживаемым в России экономическим трудностям. "В эти нелегкие времена явим делом свое христианское призвание, поддержим друг друга, дабы никто не чувствовал себя униженным, бедным, ущемленным", - отметил Предстоятель Церкви.

Сегодня ночью он возглавил в храме Христа Спасителя главное Пасхальное богослужение.

Согласно последнему опросу ВЦИОМ, Пасху в 2009 году отмечают 88 проц россия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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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 사람의 삶을 통하여, 들여다 보는 러시아 미술사와 당시의 시대적 배경들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뜨레찌야꼬프 미술관(위의 사진참조)-
러시아에는 상인이면서 미술 애호가였던 "뜨레찌야꼬프" 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1856년부터 자신의 생가에 그림을 한점씩 사들이며, 자신이 소장할 수 있는 최대의 한도로 40년동안 그림을 모읍니다. 11~ 19세기에 걸친 러시아 화가들의 그림을 사고, 가난한 화가들에게 재정적인 도움과 후원을 합니다. 뜨레찌야꼬프가 사망후 , 자신의 집과 그림을 모스크바 시에 기증함으로써, " 뜨레찌야꼬프 미술관"으로 불리게 되다, 현재 규모를 더욱 확장해 러시아 국립 미술관으로써 6만 여점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미술관에 소장된 그림의 특징은 대부분 회회 중심의 그림들로 , 유화 작품도 많이 있습니다. 11~16세기는 성화(러이아어: 이콘)가 대부분이며 , 성화는 특별히 온도와 습도 조절로의 보관상의 문제로 따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뜨레찌야꼬프 미술관을 갈때마다, " 뜨레지야꼬프에게는 사람의 잠재력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미술 세계사를 배울때 시험문제에 나왔떤 '이동파 화가' 를 기억하실 것 입니다. 바로 뜨레찌야꼬프가 살아있을 당시의 러시아 '이동파 화가'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은 이름이 아닙니다.

러시아 미술사의 시작은 18세기부터 시작됩니다. 갑작스럽게 러시아가 유럽국가들의 반열에서 인정을 받고자 , 자신들도 좀 더 가치있는 그림과 예술에 눈을 돌립니다. 그리하여 이태리 , 프랑스의 미술을 배우고 유학을 권장합니다. 뻬쩨르부르그(당시 러시아 수도)에는 "왕립 미술학교"를 세워 , 귀족 집안의 자녀들에게 유럽에서 오신 교수님들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니 그 어디에도 러시아적인 , 러시아만의 그림은 찾아 보기 힘듭니다.

- 이동파 화가-
19세기 중반에 걸쳐, 왕립 미술학교의 졸업생 14명이 "졸업 작품의 테마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자, 학교에서는 이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14명의 학생들은 단체로 자퇴서를 내고, 극동지역부터 시베리아, 모스크바 등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자신들의 작품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 더이상 그림은 지배계층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농민들도 그림을 감상하고 평가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동파 화가들의 작품 전시회는 추운 겨울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이제는 유럽의 풍경화보다는 , 러시아의 자작나무를 그리는 풍경, 유럽 사람들의 생활 모습보다는 , 러시아 사람들의 삶을 그리고 , 당시 정치적 이념에 불만을 풍자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미술계의 사람들은 누구도 이동파 화가를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계적인 미술가로써 인정을 받을 수 있고, 러시아 각지를 돌으며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을 들여다보면 , 당시의 뜨레찌야 꼬프가 나옵니다. 처음에 저는 단순히 ' 돈 많은 상인이니 , 그림을 취미로 모았나보다' 라고 생각했으나, 이 사람에 대해서 배우고, 알아갈수록 저 자신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미완성작품도 작품이다-
이동파 화가중에 "이바노프" 화가가 있습니다. "이바노프"의 대표작으로는 " 예수 그리스도의 민중에게 나타나심" 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이 보통 2층 건물만한 높이여서, 작품도 상당히 크고, 화가가 20년동안 그렸지만 안타갑게도 미완성 작품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 작품이 미완성 작품이라고 맞추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의 피부색, 눈동자부터 이 사람이 나타내고자 하는 표현법이 너무나 섬세하게 잘 나타나있기 때문입니다. 이바노프의 테마는 성경 이야기 였습니다. 정교회 기도교적 사상으로 국민들에게 신앙을 통해 삶을 극복하는 힘을 불어넣어 주고자 했습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800 여점의 작은 습작들을 소장한 방이 따로 있습니다. 미술관 내에 "이바노프" 방을 갈때면 , 하나의 작품을 위해 20년동안 화가가 끊임없이 그리고 노력할때, 비록 완성되지 못하였지만 후세 사람들은 그 그림에 박수를 보낼수 있다는 것, 진정 '미완성 작품도 작품이구나' 하는 깨우침을 줍니다. 습작된 그림들을 통해 볼수 있는 것, 정말 사람이 살아가는 삶을 배우게 해줍니다. 오늘의 작은 실천과 노력이 내일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봅니다.

-사람의 잠재력을 보는 눈-
뜨레찌아꼬프는 이바노프의 "예수그리스도의 민중에게 나타나심" 이라는 작품을 한번도 보지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바노프가 뜨레찌야꼬프를 찾아가 말 합니다." 성경을 주제로 하나의 작품을 그리고 싶습니다. 제목은 이러하고 ,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뜨레찌야꼬프는 이바노프의 작품을 보지도 못 했지만, 그 사람에게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이바노프의 말 한마디에, 뜨레찌아꼬프는 앞으로 그릴 그림을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 미리 샀다고 합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그림을 , 단지 이제부터 그릴 것이라는 그 사람의 잠재력만 믿고 , 그 그림의 값을 후하게 쳐서 지불합니다.

뜨레찌야꼬프는 늘 자신을 "미술 애호가" 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화가들의 일반적인 평가는 " 뜨레찌야꼬프에게는 전문가 이상의 안목이 있다" 는 것 이었습니다.
뜨레찌야꼬프는 아바노프 외에도 많은 화가들을 유학 보내고, 후원하고, 양성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사진설명: 뜨레찌야코프 미술관에 전시된 페도또프 작품으로 제목은 소령의 구혼)
 
-프로와 아마추어-
"페도또프" 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이사람은 25세가 넘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장교 출신으로 , 이전에도 주변의 병장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었지만 그림이 너무 좋은 나머지 , 화가의 길에 접어들기로 결심을 합니다.
당시 러시아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브률로프" 화가를 찾아가서 , "선생님, 제가 그림을 배배우고 싶은데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브률로프"는 말합니다." 당신은 이미 너무 늦었소."... 자신이 찾아가 조언을 구한 사람에게 들은 한마디는 , 너무 늦었다 입니다.

그 후로 8년이 흐릅니다. 그동안 페도또프는 혼자서 남몰래 끊임없이 준비를 해서, 유화를 통해 풍자 그림을 많이 그리고,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8년후 페도또프의 그림이 다른 작품전시회에 출전하자 , 브률로프가 말 합니다. " 당신의 그림은 이미 내가 수십년동안 쌓아온 실력을 능가하오. 당신은 꿈을 이루웠군요." 브률로프는 당시에 , 귀족 집안 사람들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6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만, 그림을 그려줄 수 있는 당시 이태리에서도 명성을 떨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전문가에게 " 당신은 나를 이미 능가하오" 라는 평가, 그 이상의 찬사는 없을 것 입니다.

폐도또프는 유화를 사진기법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소령의 구혼"(사진설명 참조이라는 작품은 , 당시에 상인계층이었던 한 집안에 딸을 , 돈 때문에 나이 많은 소령에게 시집을 보내야 하는 사연을 담은 작품입니다. 돈 때문에, 당시에 20대 초반의 젊은 아가씨가, 60대가 넘는 할아버지에게 시집가는 일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모순들을 그림으 통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비판했던 풍자의 대표 화가 폐도또프는 아파추어로써 시작했지만 , 프로로써의 인생을 평가받게 됩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분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사람은 모든일에 아마추어 정신과 프로 근성이 필요하다." 아마추어 정신은 그 분야를 사랑하는, 자원해서 하고싶어하는 마음과 프로 근성은 프로답게 수준급으로 할 수 있는 실력을 말하는 것이겠죠?.

오늘 짧게나마 러시아 미술사를 돌아보았는데 , 역사라는 것이 결국 사람이 살았던 이야기 잖아요. 과거의 인물들은 자신이 하나를 실천함으로써 , 후대에 이름을 남기고 , 공헌을 했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개인주의","이기주의" 적인 생각과 성향으로 삶을 바라보고 살아가면서 , 더 중요한 것들을 잃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을 해봅니다. 앞으로 몇십년후, 몇 백년후.. 과연 우리는 죽어서 어떤 분야에 ,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요

(글/ 2003년 MBC 모스크바 통신원 시절 작성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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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2003년 12월 12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 필자는 왼쪽으로 보이는 바실리사원, 오른쪽에 크렘린 성벽과 레닌묘를 등지고 있다.)


모스크바의 심장부인 붉은 광장을 연상하면 대부분 빨간색을 떠올립니다. 막상 붉은 광장에 처음 오는 한국 사람들의 첫마디는 “에이, 붉은 구석이 하나도 없네?” 입니다.
고대 러시아어에 “붉다”(크라스늬)는 단어의 뜻은 “ 아름답다”(크라시븨) 라는 의미로 사용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아름다운 광장” 이라고 불렀지만, 후대의 사람들이 “붉다” 라는 말의 어원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붉은 광장”이 되어진 것이죠.
2차 세계대전 후 1945년 5월 9일 , 당당히 독일군을 이기고 전승 기념식과 축제를 열었던 곳도 역시, 붉은 광장입니다. 붉은 광장의 넓이는 73000km2 에 이릅니다.

넓은 붉은 광장에 빼놓을 수 없는 것! 바로 바실리 사원이지요. (*아래 사진 참조) 바실리 사원은 이반대제가 카잔 칸을 점령하면서 기념으로 1550년 경에 건축된 사원입니다. 당시 이반대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수도사 “바실리” 의 이름을 따서 바실리 사원으로 지었습니다. 바실리 사원은 보기만 해도, 동화에 나라에 온 것 같이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당시 꽃이나 식물들의 천연 자연의 색상을 이용해 , 사원의 돔을 칠했다고 합니다.

당시 사원을 지은 건축가에게 이반 대제가 물었습니다. “자네, 이렇게 아름다운 사원을 또 지으라면 지을 수 있겠는가?” . 건축가가 대답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반 대제는 건축가의 “네” 라는 대답 한마디에 , 다시는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다른 곳에서 지으면 안된다며, 두 눈을 뽑아버렸다고 합니다. (역사책에도 나오는 사실입니다~!!!)

붉은 광장은 크레믈린과도 붙어 있습니다. 크레믈린 궁, 미국의 백악관도 같은 곳이죠?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왕가가 살았던 궁전이었습니다. 크레믈린은 높은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좀더 정확한 발음은 “ 크렘린” 입니다. (러시아에서는 크레믈린 이라는 말을 못 알아 듣지요.) 많은 사람들이 붉은 광장과 크레믈을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붉은 광장을 다녀오고, “나는 크렘린까지 다 갔다.”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지요.

크렘린의 역사는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147 년 유리 돌고루끼 라는 공에 의해서 모스크바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모스크바 도시가 세워질 당시 , 이곳은 침엽수로만 가득했습니다. 그 침엽수를 모두 깎고, 목조 건물로 , 목조 벽으로 지은 건물이 바로 크레믈 이지요. 크레믈은 러시아어로 “성벽” 을 뜻합니다. 마을 단위를 형성하고 생활하던 사람들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건축 양식을 석조건물로 바꾸면서, 오늘날의 크렘린은 16~18 세기에 모습을 지켜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크렘린은 총 20개의 망루로 둘러 쌓여져 있습니다. 그 안에 영빈관 , 박물관, 사원, 수도원, 공원 등 다양한 건물들이 있고, 세계 최대의 종과 대포가 있습니다. 20개의 탑은 저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성모 승천 탑”, “삼위 일체탑” 등.. 모두 기독교 성화에서 나온 탑이지요. 공산주의 시절 전까지는 모두 그 탑마다 성화를 걸어놓고, 성화의 이름에 따라 탑의 명칭을 정했는데, 공산주의를 택하면서 종교를 인정할 수 없자 성화를 모두 떼어냈습니다. 그래도
그 명칭은 아직도 그대로 불리어 집니다

크레믈린 19탑은 성화에서 명칭을 따왔다면, 유일한 하나 바로 “ 보로삐츠카야 바쉬냐” 라는 침엽수의 어원을 두고 있는 탑이 있습니다. 실제로 매일 같이 푸틴 대통령과 , 역대 러시아 대통령들이 출퇴근을 했었는데요, 이 탑의 이름이 다른 이유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크렘린의 역사가 시작됐고, (침엽수로만 가득했었다고 했었죠?) 크렘린이 규모를 확장해 나가는 것도 항상 이 탑을 기준으로 했었습니다.

크렘린에서 살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구가 증가되고, 후에는 크렘린 궁 내에 있던 사람들이 성 밖으로 쫓겨나 , 지금의 붉은 광장 주변에 목조 건물들을 짓게 되면서 상인들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너무나 크렘린 주변이 지저분하고 , 복잡해지자 16세기의 이반 대제가 “모든 건물을 철거하라!” 는 명령을 내리고, 크렘린에 바실리사원부터 아름다운 건물들을 짓고 , 주변을 깨끗하게 정돈해 사람들이 모두 “ 아름다운 광장 ” 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반 대제는 실제로 성격이 번개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반 대제 보다는 이반 뇌제로 많이 불렀습니다. 바실리 사원의 건축가 두눈을 뽑아버렸다는 예만봐도 , 뇌제로 불릴만 하지요??


(글/ 2003년 MBC 모스크바 통신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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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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