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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4일자 경향신문

두산 고영민 “이젠 안타 못쳐도 목욕탕 안바꿔”
 
두산 김경문 감독은 요즘 이 선수 때문에 웃는다. “순발력 좋고 발이 빨라 수비를 잘 하는데 팀이 어려울 때는 한 방씩 터뜨려주기까지 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김광수 수석코치도 “스피드가 남다르고 경기를 보는 눈이 두 수는 앞서 있다”고 거든다.

공·수 양면에서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쳐 두산의 2위 상승세를 이끈 숨은 주역 ‘2익수’로 통하는 2루수 고영민(23)이다.

무명의 설움을 딛고 붙박이 1군 주전으로 도약해 올 시즌 전 경기(83경기) 출장 중인 그는 요즘 잠실구장에 내걸리는 ‘고제트 고영민 파이팅’ 플래카드를 보면서 더욱 힘을 낸다. 그에게도 어엿한 고정 팬이 생긴 것이다.

‘고영민+가제트’인 ‘고제트’는 그가 만화 주인공 가제트 형사처럼 팔 다리를 쭉쭉 뻗어 수비하는 모습을 빗대서 붙여진 별명이다. 난생처음 프로야구 올스타(감독 추천 선수)로 뽑힌 데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예비 엔트리에도 발탁되면서 전성기를 맞이한 그를 지난 22일 잠실구장에서 만났다.

“어렵고 힘겨웠던 시절, 저에게 용기를 주셨던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며 1군 그라운드를 밟고 있어요.”

지난 14일 SK전 만루 홈런 등 6·7월에만 홈런 8발을 몰아치고, 20일에는 짜릿한 끝내기 안타를 터뜨려 시쳇말로 요즘 방방 뜨고 있는 그는 지나간 시절 얘기부터 꺼냈다.

성남고 졸업 후 2002년 입단한 프로 6년차인 그는 데뷔 후 4년 동안 2군에서 ‘눈물 젖은 빵’을 씹었다. 한여름 땡볕 아래서 훈련하느라 얼굴은 새까맣게 타들어가는데, 텅 빈 관중석을 보면 외롭고 쓸쓸했다.

고영민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열심히 하는데도 2군 생활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면서 “야구를 그만두려고 마음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때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힘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울며 떼쓰는 아들에게 글러브를 처음 사주신 어머니였다. “네가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했는지 돌아봐라. 그게 아니면 포기할 자격이 없다….”

2005년 8월. 처음으로 1군 엔트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세상을 손에 쥔 것 같은 기쁨이 밀려왔다. 들뜬 마음으로 2군의 마지막 경기를 하는데, 그날 베이스를 잘못 밟아 양쪽 발목 인대가 늘어났다. 부상으로 시즌 마감. ‘난 왜 이리도 운이 없는 걸까.’

2006년. 다시 찾아온 기회를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졌다. 1군 116경기 출전에 타율 2할7푼, 홈런 2개, 도루 14개. 김경문 감독은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그해 겨울 전지훈련에서 새벽까지 스윙 연습을 하며 땀으로 샤워를 했다. “너, 이것밖에 안되냐”고 자신을 다그치며 훈련했다.

고영민은 “야구를 못할 때는 징크스가 있었다”고 말했다. 경기 전에 목욕탕에 다녀와야 안타가 나올 것 같았고, 안타를 못 치면 다니던 목욕탕을 바꿨다고 했다. 지금은 아니다. “징크스를 탓하지 않는 게 진짜 프로라는 걸 배웠다”고 했다.

지난해 2100만원이던 연봉이 올해는 4200만원. 딱 곱절 뛰었다. 이제는 다달이 부모님에게 용돈도 부쳐드리고 저축도 한다. 야구 입문 15년 만에 처음으로 보람을 느낀다.

고영민은 요즘 한 가지 찔리는 구석이 있다. 삼진이 무려 73개. 거포 심정수(삼성)보다 1개 많은 현재 ‘삼진왕’이다. 그는 “안타를 꼭 치고 싶은 욕심에 헛방망이질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머쓱해 하면서도 “부끄럽지만 주눅들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러 2할7푼 타율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 고영민은누구?

▲생년월일=1984년 2월8일 ▲우투우타 ▲체격=1m82, 73㎏ ▲혈액형=AB ▲출신학교=도신초-영남중-성남고 ▲가족관계=1남2녀 중 둘째 ▲프로입단=2002년 두산 2차 1순위

〈임현주기자 korear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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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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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9일자 경향신문 기사 입니다.

LG톱타자 이대형 도루1위 질주… ‘대도’ 노리는 슈퍼소닉
 ‘슈퍼소닉.’ 프로야구 LG의 날쌘돌이 이대형(24)의 별명이다.

바람, 총알보다 빠른 초음속으로 다이아몬드를 휘저어 시즌 중반 도루 1위를 질주 중인 그를 지난 27일 잠실구장에서 만났다. 팔다리에 빨갛고 파랗게 터지고 멍든 자국. 이대형은 “영광의 상처”라며 환하게 웃었다. 매일 슬라이딩에 다치고 찢어져도, 일단 1루에 나가기만 하면 “그라운드를 훔치고 싶은 욕망이 솟아오른다”는 이대형.

프로 데뷔 후 5년 만에 붙박이 주전 톱타자로 발돋움해 3할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는 그는 올 시즌 LG 신바람 상승세의 당당한 선봉이다.

#꼬마 육상선수, 야구에 눈 뜨다

100m를 11초에 주파하는 이대형은 어린 시절 육상선수였다. 달리기라면 누구보다 자신있어 초등학교때 육상대회에는 빠짐없이 출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TV로 야구 생중계를 보다 한 선수에게 시선이 꽂혔다. 해태 타이거즈 이종범이었다. 바람처럼 달리고 짜릿한 안타를 뽑아내는 플레이에 11살 꼬마는 마음을 뺏겼다.

“야구가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살던 충남 대천에는 야구부 있는 초등학교가 없는 게 문제였어요.”

매일 밤낮으로 부모님을 붙잡고 광주로 전학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그렇게 원한다면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했던 아버지가 어느날 광주로 근무지를 옮겼다. 5학년때였다. 대천에는 왼손잡이 글러브가 없어 제대로 야구 한번 못했는데 광주에는 없는 게 없었다.

#고교 4학년, 투수를 포기하다

중·고교때 이대형은 투수였다. 그런데 변변한 성적을 못 냈다. 1·2학년때 선배들에게 밀려 벤치만 지키다 3학년이 됐는데도 신통찮긴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졸업하면 ‘갈 곳이 없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녔다.

“막다른 골목길에 다다른 기분이었어요. 고민 끝에 ‘빠른 발을 살려야겠다’고 마음먹고 투수를 포기했어요.”

투수 대신 중견수로 자리잡으면 적어도 프로 2군에는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야구를 다시 시작했다. 투수때는 선배 그늘에 가려 제대로 못 뛰었는데 중견수가 되니 매일 훈련하며 빠짐없이 경기에 나갈 수 있었다. 실력도 늘고 자신감도 얻었다. 중견수가 되고나서 처음으로 전국대회 우승을 맛봤다. 그리고 LG로부터 2차 지명을 받았다. 유급을 하면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았다.

#소심한 O형, 김재박 감독을 만나다

혈액형이 O형인데 지독히 내성적이다. 미니홈피에 비방 글이 올라오면 크게 상처를 받았고 결국 홈피를 없앴다. 소심한 성격을 감추려고 겉으로 잘 웃고 소탈한 척했다. 그러다가 김재박 감독을 만났다. 김감독은 이대형에게 “전쟁터에서 총들고 웃는 사람은 없다”며 “투수와의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강한 눈빛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감독은 전지훈련 중에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대형에게 육두문자를 큰 소리로 외쳐보라고 시켰다. 이대형은 김감독의 마음을 읽었다.

“이젠 나름대로 카리스마를 갖게 됐어요(웃음). 그라운드에서 집중력이 더 높아진 것 같습니다. 전보다 방망이도 더 잘 터지고요.”

#프로 5년차, 도루왕 향해 ‘훔친다’

이대형은 ‘듀라셀’ 배터리 광고 속 주인공 ‘토끼’를 닮았다. 빠른 발과 지칠줄 모르는 체력은 둘째가라면 서럽다. 이대형의 배터리 충전은 어머니가 지어주신 가물치 보약이다. 매일 아침·저녁 가물치를 먹고 힘을 낸다.

28일 현재 도루 25개를 성공해 이 부문 단독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대형의 ‘올 시즌 최고’ 도전 뒤에는 숱한 상처가 가려져 있다. 중견수가 되고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새 살이 돋아본 적 없는 오른쪽 무릎. 슬라이딩하다 까진 팔·다리 상처는 이제 감각을 잃었다. 그래도 좋다. 몸이 부러지고 으스러지지 않는 한 계속 베이스를 훔치고 싶단다. 얼마전에는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예비 엔트리에 뽑히는 기쁨도 누렸다.

“국가대표가 됐으니 더욱 열심히 뛰어야죠. 도루왕이 되는 게 목표예요. 타율도 3할대를 유지하면 더 좋겠지요. 물론 부상 없이 주전을 지키는 건 기본이고요.”

〈글 임현주·사진 김문석기자 korearu@kyunghyang.com〉

■이대형은

▲생년월일=1983년 7월19일

▲체격=1m84·78㎏

▲학력=광주 서림초-무등중-광주일고

▲2003년 LG 입단

▲수상=대통령배·청룡기·황금사자기 도루왕(2002년)

▲올시즌(2007년) 성적(27일 현재)=타율 3할(13위), 70안타(공동 6위), 38득점(공동 4위), 25도루(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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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전화 25년史 함께 한 내 번호, 뿌듯해요”

 임현주기자 korearu@kyunghyang.com  
ㆍ카폰부터 휴대전화까지 011의 200 국번 쓰는 공동석씨


 
자유로운 번호이동으로 ‘010’ 식별번호 사용자가 70%를 넘는 요즘. 이동전화가 처음 탄생했던 날부터 지금까지 25년간 그 번호 그대로 사용해온 사람이 있다.

카폰부터 휴대전화까지 011의 200국번을 쓰고 있는 순덕철강 대표이사 공동석씨(61). 올해로 창립 25주년을 맞은 SK텔레콤과 역사를 같이한 사람이다.

1984년 이동통신회선이 많지 않던 시절. 공씨는 법인명의로 카폰 4대를 신청해 어렵게 2대를 개통받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카폰 회선이 전체 2000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추첨을 통해 번호를 받았다. 로또 당첨된 것처럼 운좋게 카폰을 개통했다.”

서울 용두동 본사에서 최근 기자와 만난 공씨는 손바닥보다 작은 휴대폰을 보며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고 말했다.

공씨는 “카폰을 달고 차 뒤쪽에 1m 안테나를 세우고 다니면 교통경찰도 항상 경례를 했다”면서 “나보다 운전기사가 더 뿌듯하다며 어깨를 들썩이고 다녔다”고 회상했다.

당시 카폰을 장만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기계 값만 290만원이었고 가입비는 200만원 가까이 냈다. 그때 그 돈이면 포니 한 대를 살 수 있었던 금액이다. 통신요금은 좀 비싼가. 전화 한 통화당 요금이 1000원을 넘었다. 그 시절 직장인들 한 달 임금이 6만~7만원 정도 했으니 카폰 통화량이 조금만 늘어나면 일반 직장인들 월급을 통신비로 내는 셈이었다.

카폰에 얽힌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94년 10월21일 아침. 성수대교를 건너 출근을 해야 하는데 “대교가 붕괴됐다”며 진입을 차단해 동호대교로 돌아서 회사에 늦게 도착했다. 그날따라 카폰을 끄고 출근했던 공씨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직원들이 “집에서 전화가 수십통쯤 걸려왔다”고 전했다. 공씨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여보세요”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부인이 수화기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공씨는 “집사람이 사고 소식을 듣고 카폰으로 전화를 했는데 계속 연결이 안돼서 사고를 당한 줄 알았다”면서 “그 뒤로 카폰을 휴대전화로 바꿨다”고 말했다.

공씨는 지금까지 휴대전화 단말기는 3번 바꿨다. 그는 “통화나 문자 외에 복잡한 기능은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기계를 오래 쓴다”면서 지금은 공짜폰이 되어버린 삼성 애니콜 구형 모델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처음 휴대전화로 문자 보내는 것은 공씨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숙제였다. 삐삐처럼 누르고 녹음하는 단순한 기능이면 얼마나 좋으련만. 문자를 보내기 위해 타자 키보드 연습하는 것처럼 부단히 노력했다.

그랬던 그가 요즘은 두 며느리와 수시로 문자를 주고 받느라 정신이 없다.

정부에서 휴대전화 번호를 010으로 통합하게 되면 가장 아쉬움이 남는 사람은 공씨다. 25년간 정들었던 번호를 바꿔야 한다면 그 기분은 어떨까.

공씨는 “세월이 변하면 모든 것이 바뀌게 마련이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서 “아쉬움은 남겠지만 바꿔야 하면 또 거기에 맞춰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임현주기자 korear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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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MBC 드라마 '내조의 여왕'  촬영장에서 카메오로 출연한 표도르 에밀리아넨코를 만났다. 모든 스텝들이 박수치고,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자 표도르는 상당히 긴장한 것 같았다.

"Федор ! Скажите пожалуиста что ни-будь."
"표도르! 한말씀만 해주세요"라는 첫 마디에 "무슨 말을 해줄까요?"라며
미소지었던 표도르.  ^^;;





내조의 여왕의 오지호(달수 역)와 멋진 연기를 마무리한 표도르. 다음번 방한 때는 꼭 한번 단독 인터뷰 해주겠다는 약속 지켜주시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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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인터넷 실명제’ 거부한 구글코리아 이원진 대표

“인터넷 실명제는 인터넷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을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제도다. 힘 없는 사람이 목소리를 내는 공간을 빼앗으면 인터넷의 순기능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15일 서울 강남에 위치한 구글코리아 본사에서 만난 이원진 구글코리아 대표이사(42)는 단호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표현의 자유는 사용자를 위해선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라는 얘기였다.

구글코리아가 지난 9일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에 따라 의무화된 실명제를 거부하고 유튜브 한국 사이트에는 동영상이나 댓글 등의 게시물을 올릴 수 없도록 한 것도 그 원칙에 입각한 당연한 결정이었다.

구글코리아의 실명제 거부는 미국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가 “유튜브가 한국 정부와 ‘고양이와 쥐 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비유하는 등 국내외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논란을 제기했다.

이원진 대표는 “비즈니스 측면에서 결정했다면 실명제를 도입하는 게 맞지만 인터넷 이용자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제도였다”면서 “그동안 인터넷이 만들어 왔던 많은 장점들을 훼손시킬 수 있는 사안이어서 신중하게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실명제 도입을 안 한다고 발표한 뒤 업계 관계자들로부터 ‘한국 사업을 접으려고 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면서 “우리는 반대로 한국 시장이 중요하기 때문에 길게 보고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업자 입장에서는 정부의 정책이나 결정을 무조건 따르면 사업하기 편하다. 사실 웬만하면 (정부)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한다”면서 “하지만 구글은 사용자 위주로 결정한다는 원칙이 있고, 그 원칙을 깰 순 없었다”고 강조했다.

구글은 2007년 처음으로 한국에 지사를 설립했다. 직원은 150명이 전부다. 이제 겨우 3년차 회사로, 유튜브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15%를 차지하고 있는 구글코리아가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대표는 “네티즌이 있기에 인터넷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실명제를 거부한 뒤 게시판에 네티즌들의 응원 글이 쏟아져 나왔다. 내용을 읽으면서 표현의 자유야말로 사용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대표는 인터넷 실명제 도입으로 자칫 동영상 시장이 침체되진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서 우리가 얻은 것을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다”며 “인터넷에 바운더리(경계선)를 나누고, 사업을 규제의 틀로 묶기 보다는 인터넷 활성화를 위해 더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글은 포털 네이버나 다음처럼 메인 화면에 광고를 하지 않는다.

이 대표는 “메인에 광고 넣고 배너광고 몇 개 달면 매출을 확 끌어 올리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러나 돈을 좇다보면 사용자(네티즌)가 떠난다”면서 “메인 화면에서 사용자들이 가장 빨리, 많은 정보를 검색할 수 있도록 연구하다 보면 매출은 자연히 따라 온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많은 리스크(위험부담)가 있겠지만 조급해하지 않겠다”면서 “검색의 차별화를 통해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검색되고 활성화된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글 임현주·사진 김정근기자 korearu@kyunghyang.com>
  2009년 4월 16일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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