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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취재 사진 모음

 

 

 

 

 

 

 

 

 

 

 

 

 

 

 

 



체르노빌 원전을 취재하면서 작은 디지털 카메라에 담은 풍경이다. 취재를 도와준 니콜과 사진부 김형수 선배의 사진 촬영 됫모습 등을 찍었다. 프리퍄티 도시에서 올라갔던 호텔 아래 풍경, 방문했던 학교와 교실의 출석부... 정말 참담함 그 자체였다.
유치원에는 인형 옆에 방독면이 항상 놓여있었고, 건물마다 비가 새서 어깨에 떨어진곤 했다 가끔 방사능 측정기가 울려서 같은 지역이라도 조심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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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체르노빌 보고서-중앙일보 임현주 기자, 원전 재앙 25년 ‘죽음의 땅’ 가다 ③

"월급 5배 받고 원전 수습한 아버지 방사능 노출로 10년 만에 숨져”

원전 폭발 때 여섯 살이었던 안드레이가 체르노빌에서 가족과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보여주며 사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고 이후 그는 키예프로 이주해 결혼을 했지만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키예프=김형수 기자]
기자는 4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만난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체르노빌과 프리퍄티 이주민이 거주하는 하리코프스키 지역으로 갈 수 있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이주민들이 겪었던 실상을 취재하고 싶다”고 하자 택시기사는 자신의 처남인 안드레이 리세녹(31)을 소개해줬다. 사고를 경험한 상당수의 주민들이 “더 이상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취재에 응하지 않은 터였다. 안드레이는 사고 때 여섯 살에 불과했지만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프리퍄티에서 빵을 팔았고, 아버지는 체르노빌 우유공장에서 일했다. 사고 당일 그는 옆집 아저씨 도움으로 체르노빌에서 90㎞ 떨어진 할머니 집으로 피신했다. “집 문을 나서는데 하늘엔 헬리콥터가, 도로에는 수십 대의 소방차들이 원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부모님은 사고 발생 후 2주가 지나서야 할머니 댁으로 왔다. 체르노빌 원전 가동을 당장 중단할 수 없기 때문에 원전 근로자들을 위해서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안드레이는 “사고가 난 이후 가족들이 함께 지내고 있을 때 체르노빌 원전 책임자가 아버지를 다시 불러들였다”고 말했다. 당시의 월급보다 5배나 많은 550루블을 받는 조건으로 원전에서 근무했다. 2주를 일하고, 2주는 쉬는 조건이었지만 결국 방사능에 노출돼 10년 만에 숨졌다. 안드레이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정부에서 확보한 요오드가 모자라자 15세 이상 성인들에게는 와인과 메밀 섭취를 권장했다”고 했다.

 안드레이는 어린 시절 프리퍄티 강에서 아버지와 낚시하던 사진을 꺼내 들었다. “원전 사고로 행복했던 우리 가족의 삶은 한순간에 파괴됐다”고 말했다. 어머니도 지난해 돌아가셨다.

안드레이는 “사고 직후 사람들은 모두 1년 안에 죽는다, 2년 안에 죽는다며 괴로움에 시달렸다”고 했다. “수술을 받고 회복한 사람도 있지만, 정신적 충격을 견디지 못해 보드카만 마시다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도 많았다”고 설명했다.



임현주 기자
 7년 전 결혼한 안드레이는 “체르노빌 주민 자녀들은 고등학교까진 학비가 없고, 대학 등록금도 50% 지원된다”며 “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의료비 지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무릎 통증과 암 등 사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웃이 많다”며 “정부에서 추가 보상을 거부해 소송 중인 사람도 많다”고 했다.

  체르노빌 박물관 과학 담당 이사 안나 체르니코바는 “한국도 일본·중국 등 인접 국가의 예기치 못한 사고로 방사능 피해 국가가 될 위험이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요오드 등 방사능 치료 물자를 충분히 확보하는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키예프=임현주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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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4일자 중앙일보 3면

인구 5만 ‘천재들 도시’가 유령의 도시로

중앙일보 임현주 기자, 체르노빌 원전 재앙 25년 ‘죽음의 땅’ 가다 ②



체르노빌에서 3㎞ 떨어진 도시 프리퍄티의 한 건물에서 내려다본 시내 전경. 1986년 원전 사고 직후 주민들이 피난가면서 이곳은 폐허가 됐다. 발전소 직원 니콜리아 파닌(오른쪽)은 프리퍄티를 가리키며 “유령의 도시”라고 말했다. [프리퍄티=김형수 기자]

3일 오전(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프리퍄티.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북쪽으로 3㎞ 떨어진 곳이다. 체르노빌 동편의 강 이름을 따 1970년 지어진 계획도시다. 체르노빌 원전에서 근무하던 직원과 가족 5만여 명이 살았으며 평균 거주 연령은 26세였다. 소련 체제 때 공산당이 젊은 천재 과학자들을 이곳에 강제 이주시켰다.

 체르노빌에서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자 호텔과 학교·유치원 등 폐허가 된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첫 인상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중앙 광장에 있는 8층짜리 호텔로 올라갔다.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파트 단지 뒤에는 이 마을을 유령의 도시로 전락시킨 원전 4호기가 자그맣게 보였다. 계단마다 당시 충격으로 깨진 유리 조각들이 깔려 있었고, 객실의 옷장은 유리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삐거덕거렸다. 천장에 고여 있던 빗물이 어깨 위로 떨어졌다.

 호텔 앞 문화예술극장에는 1986년 사고 당시 상연 중이던 작품의 포스터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수퍼마켓에는 버려진 카트가, 수영장 위에는 사고 발생일인 86년 4월 26일 오전 1시26분에 멈춰선 시계가 그대로 있었다. 프리퍄티는 사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의 방사능 피폭 수준은 3만3000마이크로시버트(μ㏜)였다.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에 따르면 방사선 피폭량이 7000μ㏜ 이상이면 며칠 내 사망할 수 있다.

 당시 소련 정부는 원전사고 후 36시간 만에 버스 1200대를 동원해 3시간 동안 이곳 주민들을 모두 외곽으로 대피시켰다. 폐허가 된 학교 교실에는 출석부와 학생 25명의 시험 점수, 과목별 과제를 기록한 노트가 널브러져 있었다.

 유치원에는 곳곳에 인형과 방독면이 굴러다녔다. 버려진 사물함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실내화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건물 안쪽엔 여러 방에 어른 키 반만 한 침대들이 20~30개씩 들어서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빅토르 이바노프(37)는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방독면 착용법을 배웠지만 막상 원전 폭발 후 방사능 차단에는 도움이 안 됐다”며 “사고 직후 정부는 황급히 15세 미만 아이들을 모두 우크라이나 남쪽 오데사·크림 지역으로 대피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지도상으로 키예프에서 체르노빌까지 직선 거리는 70㎞밖에 안 된다”며 “당시 체르노빌과 키예프 인근 15세 미만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모두 부모와 3개월 이상 떨어져 지내야 했다”고 덧붙였다. 프리퍄티를 함께 둘러본 비상대책위 관계자는 “이곳은 원전사고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완벽한 도시였다. 하지만 한순간의 실수가 국가 최고 인재들과 가족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혔고,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을 보게 했다”고 설명했다.


임현주 기자


 체르노빌 통제구역 30㎞ 인근에는 현재 원주민 수백 명이 돌아와 생활하고 있지만 프리퍄티는 지금도 방사능 수치가 높아 출입 시 비상대책위의 별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 2시간 이상 체류할 수도 없다. 발전소에 근무하는 니콜라이 파닌은 프리퍄티를 “유령의 도시”라고 말했다.

프리퍄티(우크라이나)=임현주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프리퍄티=우크라이나 북부에 있는 도시로 소련 정부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와 함께 계획해 건설했다. 체르노빌 원전 직원과 가족 5만여 명이 살았지만 1986년 사고 이후 유령도시가 됐다. 대피 명령 후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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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블로그에 인사를 합니다.
중앙일보로 회사를 옮기고 첫 출장지로 '체르노빌'을 오게 됐습니다

오늘부터 시리즈 1회가 나가면서 2회 '유령의 도시' 쁘리뺘찌  등
총 3회의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체르노빌 취재 첫날 방사능을 많이 쬐서 ^^;;
약간 겅정이 되기도 합니다만, 이 곳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그로인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자세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중심으로 기획안을 짜고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의미있는 기사가 될 수 있도록 잘 준비할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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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2일 중앙일보 1면 기사

2011 체르노빌 보고서 … 중앙일보 임현주 기자, 원전 재앙 25년 ‘죽음의 땅’을 가다

우릴 태운 운전사는 내리지 않았다
방사능보다 더 무서운 ‘불신의 공포’


1986년 4월 최악의 원자력 사고가 일어났던 체르노빌 원전 원자로 4호기. 26일로 사고 발생 25년을 맞는 이곳은 지붕과 측면이 콘크리트 방호벽과 철재 보강재로 덧씌워져 있다. 취재진이 방사능 측정기로 재본 결과 5.22μ㏜로 X선 촬영 때(30~50μ㏜)보다 낮지만 장기간 노출될 경우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저주받은 땅이었다. 1일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체르노빌로 향하는 차창 밖으로 믿기 힘든 풍경이 다가왔다. 차로 두 시간 정도 달렸을까. 하얀색 자작나무 가지가 붉은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에는 축구공처럼 생긴 작은 가지들이 듬성듬성 매달려 있었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30㎞ 떨어진 주민통제소를 지났다. 통제소 안쪽은 지난 25년간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까닭에 허가를 받은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 통제소의 ‘스톱(Stop·멈춤)’ 표지판에서 1986년 4월 26일의 원전 폭발 사고가 얼마나 깊은 후유증을 남겼는지 느껴졌다. 하지만 신원조회를 하는 현지 경찰에게선 긴장감이 엿보이지 않았다. 안전불감증은 15년 전 중앙일보가 찾았을 때(1996년 4월 25일자 보도)와 달라진 게 없었다.


임현주 기자

 원전을 10㎞ 남겨둔 지점부터 방사능 측정기 수치가 널 뛰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25년 전 폭발음과 함께 전 세계를 악몽으로 몰아넣었던 원자로 4호기가 몇 분 후 모습을 드러냈다. 지붕과 측면을 콘크리트 방호벽과 철제 보강재 등으로 덮어 씌운,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를 통치하던 소련 정부는 사고 7개월 뒤에야 4호기 잔해와 오염물질을 콘크리트로 덮는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원자로 안에는 아직도 150t 이상의 방사성물질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자 일행은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현지인 운전사 유리 타바셴코(44)는 “아내는 내가 이 근처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펄쩍 뛸 것”이라며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체르노빌 원전에서 30㎞ 지점에 있는 통제소에서 현지 경찰이 방사능 검사를 하고 있다. [체르노빌=김형수 기자]
원전 10㎞부터 측정기 숫자 요동

방사능, 50배 이상으로 치솟았다


방사능 측정기를 꺼내 보니 시간당 5~11마이크로시버트(μ㏜)로 측정됐다. 서울과 비슷한 수치(0.2~0.3μ㏜)를 보였던 통제소보다 많게는 50배 이상 증가한 것이었다. 벽면 틈 사이로 흘러나온 듯한 붉은 녹물 흔적도 보였다.

 통제지역 관리청 측의 공식 입장은 “일부 방사성 물질이 외부로 방출되긴 하지만 극히 소량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관리청 측은 “앞으로 15년은 더 버틸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지 주민은 이 같은 발표를 믿지 않고 있다. 당시 서둘러 만들었던 콘크리트 방호벽에 균열이 생기면서 대기 중으로 상당량의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키예프 주민 표트르 레시토프(39)는 “체르노빌의 방사능 수치가 떨어졌다고 하지만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은 대부분 70세 이상 된 노인들뿐”이라며 “정부에서 안전하다고 주장해도 믿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여성들이 출산을 않는 것도 이런 우려 때문”이라고 했다.

 주민들의 ‘방사능 공포’는 뿌리 깊은 정부 불신에서 비롯됐다. 원자로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조작 실수로 폭발 사고가 일어나자 구 소련은 정보 차단에 급급했다. 사고 후 이틀 뒤에야 TV 방송을 통해 사고 사실을 발표했다. 사고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약 1200㎞ 떨어진 스웨덴 포스막 원자력발전소에서 전례 없던 방사능이 검출돼 소련에 공식 해명을 요구하자 마지 못해 밝힌 것이다.

 사고 당시 2분 만에 현장에 도착해 화재 진압에 나섰던 300여 명의 소방대원들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숨져갔다. 발전소에서 근무하는 니콜라이 파닌은 “정부가 방사능에 대한 위험을 전혀 알리지 않아 별도의 안전장비 없이 화재를 진압하다 흘러나온 방사성 물질에 노출돼 한 명씩 죽어갔다”고 했다. 철저한 정보 폐쇄로 유지됐던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재앙을 키운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는 주민들의 정부 불신으로, 제2, 제3의 방사능 공포로 이어지고 있다. 방사능이란 ‘괴물’과 싸우는 데 있어 정부의 정보 공유 노력과 국민의 신뢰가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준다.

 현재 우크라이나 정부는 원자로 4호기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유럽연합(EU) 등의 지원을 받아 콘크리트 방호벽 위에 철제 방호벽을 덧씌우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현지 주민들은 작업 과정에서 또다시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빅토르 페트렌코(64)는 “후쿠시마 원전 보도를 접할 때마다 체르노빌 악몽이 떠오른다” 고 말했다.

체르노빌(우크라이나)에서 글=임현주,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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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텍스트.

임현주 한국일보 기자
mosqueen@hanmail.net

-“XXX당 OOO의원입니다. 어떤 정치적인 의도로 그런 기사를 쓰셨습니까”
=“정치적 의도라뇨? 제가 정치인입니까. 취재과정에서 알게 된 것을 기사화한 것뿐입니다.”
-“기자님이 아니라면 데스크의 의도가 있었겠죠. 그럼 인터넷만이라도 기사를 바꿔주십쇼.”
=“그렇게 못하겠는데요.”
-“그럼 제가 소송을 진행하려 하는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뚝.(신호음 끊김)

지난 여름, 법조팀으로 발령 받고 서초동에 오자마자 ‘민간인 사찰’을 취재했다.
검사들은 사실관계를 직접적으로 확인해주지 않기 때문에 “확인해줄 수 없다”는 말도 뉘앙스에 따라 답이 ‘Yes or no’ 갈라져, 가능하면 팩트 확인은 직접 찾아가서 하라고 배웠다. 서울중앙지검에서 취재했던 첫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크렘린’. 검찰 관계자는 모두 성벽으로 둘러싸여 속을 알 수 없는 크렘린 같았다. 처음부터 검찰 내부 취재가 힘들기 때문에 열심히 외곽취재를 해서 팩트를 물어오면, 가뭄에 콩 나듯 겨우 한두 개쯤 확인했다.

그렇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검찰 취재에 적응해나갈 무렵, 저녁 뉴스에 “현역 국회의원과 그 부인도 사찰 대상이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흠, 오자마자 ‘물(낙종)’을 먹었으니, ‘반까이(만회)’를 해야 하는데, 법조 경험이 없다 보니 먹성 좋은 돼지마냥 이것저것 물어보며 찾아다녔다.

불법 사찰은 분명 잘못된 것인데,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왜 현역 의원과 그 부인을 사찰했는지 그 배경이 궁금했다. 취재 과정에서 경찰과 검찰이 같은 사안, 같은 혐의를 놓고 동일 인물 2명을 피해자와 피의자 정 반대로 바꿔 놓고 수사했던 사실을 확인하고는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A의원 부인 소송 사건 당시 외압 행사 의혹”(한국일보 7월 24일자 종합5면)
모든 언론 보도 방향은 민간인 사찰이 얼마나 광범위한 대상으로 이뤄졌느냐에 있었는데, 한국일보는 그 해당 의원과 관련해 사찰했던 내용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A의원은 보도 즉시 “인터넷에 기사를 내려달라”고 연락을 했고, 취재한 입장에선 “근거가 있으므로 내용을 바꾸거나 내릴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서로 불쾌한 감정만 드러내며 전화를 끊었다.

이제 막 법조를 출입하게 된 5년차 기자는 어느 4선 의원으로부터 “소송 걸겠다”며 받은 전화가 “기사 안 내려!”라는 압박으로 들렸다. 일반인이 4선 의원을 상대로 싸운다면? 글쎄… 그 부담을 견뎌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신청했고, 나는 취재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언론중재위에 제출할 자료를 준비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겉으론 담담한 척 하면서도 속으론 “나중에 소송까지 가면 진짜 피곤해질 텐데…”라며 가슴 졸이던 ‘소심한 기자’였다.

며칠 후 언론중재위에 갔다. 작은 법정처럼 서울중앙지법에서 파견 나온 모 부장판사를 포함해 총 6분이 계셨다. 준비한 자료에 형광펜으로 밑줄 그은 부분을 근거 자료로 제출하자, 한 분께서 A의원 측 변호사에게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정정보도를 요청했나요, (A의원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리고 한국일보 법조팀장에게는 “취재 꼼꼼하게 잘했다”며 격려를 했다. 팀장은 프레스센터를 나오면서 “언론중재위에 몇 번을 왔지만, 안 깨지고 칭찬 듣긴 오늘이 처음이다”고 했다.

검찰이 공직윤리지원관실 이인규, 김충곤, 원충연 씨 등을 기소할 때쯤 서울중앙지법으로 자리를 옮겼다. 매주 화·목요일마다 집중심리가 열렸고, 틈 날 때마다 법정에 들어갔다. 기자들의 관심사는 ‘비선라인이 밝혀지느냐’였지만, 검찰이 기소한 혐의 내에서만 재판이 이뤄지니 그동안 보도된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 전개가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공직윤리지원관실 내부 라인과 갈등에 대해 기사를 썼는데 구속 기소된 B씨 부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당신이 내 남편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니 가만있지 않겠다”며 “남편이 억울하게 구속된 것도 화가 나 죽겠는데, 당신 기사 때문에 얼마나 열 받은 줄 아냐”며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했다. 결국 B씨는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취재도 힘든데, 어렵게 기사 하나 쓰면 “소송 건다, 가만 안 있겠다”며 소리 지르는 전화를 받기가 일쑤였다. 겉으론 덤덤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야근하고 집에 들어갈 때면 ‘누구 뒤따라오면서 해코지 하는 사람 없나’ 돌아보게 됐다.

이제 겨우 법조를 출입한 지 6개월. 짧은 시간 동안 지검, 지법을 거쳐 대검찰청을 출입하고 있다. 서초동은 학연·지연이 중요한 곳인데, 독특한 이력 탓에 “선배님~”하면서 넉살 좋게 찾아가 인사할 사람도 없다 보니, 법무부·대검 주최 등산이나 외부 행사는 적극 찾아 다녔다. 발품 팔고 눈도장 찍으며, 학연·지연만큼이나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가며, 아직도 ‘적응 중’에 있다.

서초동에서 검찰·법원이 돌아가는 시스템을 보며 ‘법 앞에 평등’이 아닌 ‘무전유죄, 유전무죄’인 세상인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누군가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밤늦게까지 땀 흘리는 판사, 검사, 기자들을 보며 희망을 가져본다.

한 달 전쯤, 친구가 “재밌다”며 추천해준 영화 ‘부당거래’를 보면서도 단순히 ‘재미’가 아닌 ‘씁쓸한’ 그 무언가를 느꼈던 이유도 비슷하다.
관객들이‘장인 잘 둔’스폰서 검사와 ‘배우(가상의 범죄자)를 쓴’ 광수대 에이스 팀장,‘접대와 로비를 받으며 기사를 쓴’구악 기자를 보며 웃을 때, 나는 그 어떤 외압에도 흔들림 없이 소신껏 일하고자 하는 서초동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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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거리에 캐롤 송이 울려 퍼질 때 쯤이면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뉴이어가 쓰여진 카드들이 거리에 나와있는데요. 러시아에서는 항상 해피뉴이어 앤 메리크리스마스로 인사를 합니다.

 С новым годом  и с рожеством!  ( 노빔 가돔 라즈줴스트봄!)

 

러시아 사람들은 항상 새해 인사를 크리스마스 인사보다 먼저 할까 궁금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크리스마스는 12 25일이고, 새해는 1 1일인데... ^^;

 

그런데 러시아 달력을 보면 궁금증이 풀립니다.

러시아 달력에는 12 25일이 평일이고, 크리스마스는 1 7일로 되어있습니다.

전세계인들이 12 25일을 기념하는 러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1 7일을 기념하냐고요?

 

러시아 국교인 정교회가 받아들여질 무렵 정교회에서 사용했던 달력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그레고리력과 13일쯤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12 25 +13일은 1 7일이라서 크리스마스를 1 7일에 기념하는 것이죠.

 

새해 아침이 밝아오고, 초에 성탄절을 기념하는 러시아 사람들에겐 연휴가 시작됩니다.

한국이나 중국처럼 구정을 지내는 문화도 없기 때문에 1 1일부터 최소 일주일에서 최대 열흘까지 신년 연휴에 들어가지요. 5 근무제가 철저하고, 만약 연휴가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있는 경우에는 금요일 또는 월요일까지 이어서 쉬기 때문에 보통 1일부터 7, 1일부터 10일까지 쉬는 직장과 관공서들이 많습니다. (출장을 가시려면 날은 피하시는 좋겠죠.)

 

러시아 사람들은 건물 5-6 높이의 소나무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기도 하고요, 거리 곳곳마다 산타할아버지와 눈꽃요정(스녜그루치까) 함께 다니며 아이들을 축복해주고 선물을 주는 장면을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산타할아버지보다 인기 많은 눈꽃요정은 작고 늘씬하며 귀여운 마스크의 언니들이 머리를 길게 따서 작은 왕관을 쓰고 산타할아버지 선물 전달을 도와주곤 하죠. ^^; 러시아에서는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많이 갖고 있어서 부럽다기 보다는 눈꽃요정과 항상 함께 다닐 있어서 부럽다고 말하곤 합니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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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랴그호. 러시아가 비록 러일전쟁에서 패했지만, 바략그호의 정신은 러시아인들을 하나로 결속시켜주는 큰 연결고리가 됐다고 합니다. 2000년대 이후에 바랴그함과 관련된 러시아 영화도 만들어져 흥행을 했었다고 하는데,  바랴그호 관련 기사가 있어서 모아봤습니다.



[오늘의 세상] 러일전쟁(1904년)때 수장된 러 전함 깃발, '사실상 반환'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입력 : 2010.11.02 03:00

G20 정상회의 때 '2년 대여' 형식
러일전쟁 제물포해전서 자폭한 러시아 함선 바랴그호 유물, 인천시립박물관이 보관 중…
문화재보호법상 반출 안되지만 추가 연장 적극 논의 하기로

1904년 2월 9일, 인천 제물포항에 정박해 있던 순양함 '바랴그(노르만인)호'와 포함(砲艦) '카레예츠(한국인)호' 등 러시아 전함(戰艦) 두 척이 일본 전함 14척의 기습을 받았다. 20세기 초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결정지은 러일전쟁의 개전(開戰)이었다. 격전 끝에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러시아 전함은 항복하는 대신 스스로 자폭(自爆)을 택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일본 해군은 가라앉은 바랴그호에서 함선 깃발과 포탄·포탄피·총·닻 등 14점을 수거해 인천향토관에 보관했고 이 유물들은 광복 후 1946년 인천시립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인수했다.

러일전쟁 당시 인천 앞바다에 수장됐던 러시아 전함의 깃발이 106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간다. 인천시는 러시아가 그동안 반환을 요구해 오던 바랴그호 깃발을 오는 11~12일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 때 러시아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러시아에 '2년 대여' 형식으로 돌려줄 예정이라고 1일 밝혔다.

 

▲ 러일전쟁 당시 인천 앞바다에 수장됐다가 106년 만에 조국에 돌아가는 러시아 전함 ‘바랴그호’ 깃발. /인천시립박물관 제공

인천시는 "바랴그호 깃발은 국가지정 문화재는 아니지만 문화재보호법의 규정에 따라 '2년 대여' 형식으로 돌려주기로 했다"며 "형식은 '2년 대여'이지만 얼마든지 추가 연장이 가능한 '사실상의 반환'"이라고 강조했다. 문화재보호법은 '비지정 문화재라도 동산(動産)문화재의 경우 국외로 수출하거나 반출할 수 없고 다만 전시 목적으로 반출할 경우 2년 이내에 다시 반입한다는 조건으로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송영길 인천시장은 "올해 한러수교 20주년과 G20 개최를 계기로 '사실상 반환'이라는 결단을 내렸고, 앞으로 학계·문화계, 중앙정부와 추가 연장을 적극 논의해 나가겠다"며 "러시아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관련된 유물과 사료가 많아 이들을 대여받아 전시하면 우리나라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랴그호 깃발'은 가로 257㎝, 세로 200㎝ 크기이며 러시아 국민에게는 조국에 대한 헌신과 희생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러시아 역사 교과서는 바랴그호에 대해 '비록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것보다 더 러시아인의 혼을 빛냈다'고 가르친다.

 

▲ 지난 2월 9일 인천 앞바다의 해군 초계함 ‘부천함’ 함상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콘스탄틴 브누코프 주한 러시아대사 등 러시아 참석자들이 러일전쟁 당시 자폭했던 러시아 전함에 탑승했던 해군 장병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김용국 기자 young@chosun.com

러시아 해군은 1989년 최신 순양함에 '바랴그호'라는 이름을 붙였고 1996년부터 매년 2월 9일 인천항을 찾아와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지난 2004년에는 인천 연안부두 친수공원에 바랴그호 등에 승선했던 러시아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고 제막식과 추모행사가 열렸다. 러시아는 2000년대 들어 바랴그호 깃발의 존재를 알게 된 뒤 계속 반환을 요청해왔으며, 지난해에는 바랴그호 관련 유물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9개 도시에서 순회전시됐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모든 유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번에 인천시가 바랴그호 깃발을 조건 없이 흔쾌히 반환하면 양국의 실질적 관계 발전에 크게 기여할 뿐 아니라 세계 문화재 반환의 역사를 새로 쓰는 뜻깊은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분수대] 용사의 진혼

[중앙일보] 입력 2010.04.28 00:08 / 수정 2010.04.28 00:33


1904년 2월 9일 오전 제물포 앞바다에서 순양함 6척과 어뢰정 8척의 일본 함대가 불을 뿜었다. 항복을 거부한 러시아 함정 ‘카레예츠’호와 ‘바랴그’호를 향해서다. 러시아 수병들은 최후를 각오하고 항전했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 러시아 함장은 스스로 급수용 판을 열어 바랴그호를 수장하고, 카레예츠호를 폭파한다. 함정이 전리품으로 일본군 손에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러일전쟁의 발발을 알린 제물포 해전이다(가스통 르루,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던 러시아 용사들은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들의 얘기가 교과서에 실렸고, 해군 생도들에겐 조국애의 상징이 됐다. 한·러 수교 이후 매년 전투해역에서 진혼(鎭魂) 의식이 치러지고, 2004년엔 인천에 러시아 수병 추모비가 건립됐다. 1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에도 수병의 넋을 향한 ‘진혼’은 멈출 줄 모른다.

싸움터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은 인류 공통의 의례(儀禮)다. 해마다 10월이면 전남 해남군 문내면 울돌목 앞에선 씻김굿이 벌어진다. 왜군과의 싸움에서 숨진 조선 수군의 영혼을 불러내 위로하는 진혼 행사다. 6월에는 한국전쟁 격전지였던 강원도 화천 ‘비목(碑木)의 계곡’에서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는 진혼무(鎭魂舞)가 펼쳐진다. 19세기 말 북미 인디언 파이우트족도 망자(亡者)를 위한 진혼무를 행했다. 쓰러져간 병사들이 묻힌 땅에서 되살아나 부족이 황금기로 다시 돌아갈 것이란 믿음에서였다.

동서고금의 시인들은 전장(戰場)에서 목숨을 던진 용사들을 영웅으로 기렸다. 중국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이 전사자를 애도한 노래 또한 그러하다. ‘진실로 용감하고 또한 무예도 뛰어나며(誠旣勇兮又以武)/ 끝내 굳세고 강하니 능멸하지 못한다(終剛强兮不可凌)/ 육신은 이미 죽었어도 정신은 영험하니(身旣死兮神以靈)/ 그대 혼백이여, 귀신 가운데 영웅이다(子魂魄兮爲鬼雄)’(지영재 편역, 『중국시가선』).

 

‘천안함 46인 용사’의 전국 합동분향소에 추모객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 애도의 눈물은 천안함 용사들의 영혼을 달래는 온 국민의 진혼무요, 진혼곡이다.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46인의 영웅들은 국민 마음속에 길이 남을 것이다. 이제 부디 편히 잠드시라. 그리고 호국신(護國神)이 돼 조국의 바다를 끝까지 지켜주시라.

김남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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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검찰총장 회담



(서울=연합뉴스) 배재만 기자 = 김준규 검찰총장과 유리차이카 야코블레비치 러시아 검찰총장이 10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회의실에서 '양국간 신속한 수사공조 증진방안'을 주제로 회담을 하고 있다. 2010.11.10



인사말하는 김준규 검찰총장



(서울=연합뉴스) 배재만 기자 = 김준규 검찰총장이 10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회의실에서 열린 유리차이카 야코블레비치 러시아 검찰총장과의 회담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10.11.10

scoo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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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글을 남기네요.
그동안 정말 정신없이 바빳습니다.
 
지난달에는 태광그룹 사건 취재하느라 서부지검 파견 나가있었고
중간에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2주 정도 누워있다 퇴원한지 며칠
안됐습니다.
 
다시 서초동으로 복귀해서는 대검찰청을 출입하게 됐는데
김준규 총장께서 러시아 검찰총장 방한할 때 통역을 부탁하셔서
좋은 경험 했습니다.

기자는 '사람'만나는 직업이라 '사람'때문에 울고, '사람' 때문에 웃으며
살아가는데, 최근 며칠 동안 좋은 사람들을 속에서 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블로그 쥔장이 업무에 '몰입'하고, '개인 사정'으로 관리를 제대로
못했는데도 '빈집'을 방문해주신 분들 감사하고요.
좋은 콘텐츠, 좋은 글 많이 쓸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감사합니다!
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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