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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7월 12일자 한국일보
병상뿐인 병원 세워 25억 보험사기
노숙자 등 662명 모집해 환자로 조작… 병원 소유자 등 5명 기소

임현주기자 korear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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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합동 보험범죄 전담대책반(반장 백기봉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장)은 11일 병원을 차려놓고 가짜 환자 수백명을 유치해 10개월간 수십억대 보험금을 챙긴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등)로 병원 소유자 김모(48)씨 등 4명을 구속기소하고, 병원장 김모(36)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병원 소유자인 김씨는 지난해 6월 경남 마산에 D병원을 연 뒤 올 4월까지 가짜 환자 662명을 입원 치료한 것처럼 허위 기록을 만들어 보험금 25억여원을 타낸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는 브로커들에게 1인당 5만~10만원을 주고 가짜 환자를 유치한 뒤, 월 1,000만원을 주고 병원장으로 채용한 의사 김씨에게 진료기록을 허위로 작성토록 했다. 브로커들은 노숙자까지 끌어들여 입원시키거나, 본인이 입원한 것으로 기록을 조작했다.

이렇게 해서 김씨는 가짜 환자 1인 당 평균 3주 입원한 것으로 꾸며 490만원씩의 보험금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기본적인 의료기기도 갖추지 않은 D병원은 병상 102개만 달랑 갖춰놓고 하루 최대 147명을 입원시켰으나, 외래진료 환자는 하루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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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7월 12일자 한국일보
"하늘 간 동료의 딸 대학 진학은 봐야…"
교통사고로 숨진 故 송진섭 검사 유족 돕는 동료들

임현주기자 korearu@hk.co.kr


"아파트를 사느라 진 빚과 어린 두 딸만 남겨두고 갔네요. 고생만 하다 갑작스레 떠났는데. 큰 딸(중1)의 대학 진학까지는 동료들이 돕고자 합니다." (법무부 한 관계자)

지난 1일 새벽 퇴근길에 교통사고로 숨진 고 송진섭(45) 법무부 범죄예방기획과장(사법연수원 22기)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법무부와 검찰 선후배들이 유족 돕기에 나섰다. 고인이 남긴 재산이 대출 받아 산 아파트가 거의 전부고, 전업주부인 부인이 이제 은행 빚과 어린 자녀 교육 등 생계 전반을 책임지게 됐다는 사정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이달 초 검찰 내부통신망에는 "송 검사의 큰 딸이 어려움 없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앞으로 5년간 매월 1만원씩 유족의 계좌로 자동이체하자"는 한 동료의 글이 올라왔다. 호응이 번지면서 법무부 과장급 간부들은 2,000만원을, 평검사들은 1,000만원을 모았다. 성금은 며칠 새 7,000만원이 모여 최근 유족에게 전달됐다. 송 검사가 근무했던 범죄예방기획과도 다음달부터 월 1만원씩 유족 계좌로 보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송 검사의 사법연수원 선배인 한 관계자는 "송 검사를 20년 넘게 지켜봤지만 언제나 공을 다투는 법 없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며 "갑자기 떠나 보내 마음이 아프고, 유족� 앞으로 생계를 어떻게 꾸려나갈지 걱정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돕고 싶다"고 말했다. 송 검사의 대학동기들도 최근 모임을 갖고 부인의 일자리를 알아보기로 하는 등 유족을 도울 다양한 방법을 의논한 것으로 알려졌다.

숨지기 전 송검사는 아동 성범죄 재발을 예방하기 위한 전자발찌 관련 법안과 화학적 거세법안의 국회 통과를 위해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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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한 무장간첩 다시 간첩활동하다 적발                                                                    2010년 7월 5일자 한국일보  
가족 만나러 밀입북 北에 포섭돼… 황장엽 소재 파악 임무 등 수행

임현주기자 korear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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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무장간첩으로 남파됐다 전향한 60대 남성이 최근 다시 간첩활동을 하다가 적발됐다. 그는 북한에 남겨진 가족을 만나고자 수 차례 밀입북하는 과정에서 북한 당국에 재포섭된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이진한)는 북한 지령에 따라 국내에서 간첩활동을 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한모(63)씨를 구속했다고 4일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69년 전북 고창지역 해안에서 검거된 한씨는 전향한 뒤 다른 간첩 검거에 기여한 공로로 기소까지 면했다. 이후 대기업에 근무하고 미국 이민도 다녀오는 등 90년대 중반까지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았다. 하지만 북한에 있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못 이겨 96년 밀입북을 감행했고, 결국 발각되면서 북한 보위사령부에 다시 포섭됐다.

북한이 한씨에게 내린 지령은 다양했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거처는 물론, 탈북자 수용시설인 하나원의 조직과 운영 실태, 탈북자의 최근 동향을 파악하라는 임무가 내려졌다. 그는 수집한 정보를 이메일을 통해 암호 형태로 북한에 보고했다. 또 2007년까지 모두 4차례 직접 북한에 들어가 보위사령부 고위 간부까지 만나 남한의 정보를 전달했다.

검찰 관계자는 "한씨는 이념보다는 북의 가족이 '미끼'로 작용해 다시 포섭된 경우"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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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로 발령났습니다.
예전에 사회부에서 마지막으로 강남경찰서 출입하면서 강남, 수서, 송파, 서초 등을 챙겼는데
바로 그 라인에있는 서초동으로 왔습니다.
법조 기사는 항상 읽으면서도 '어렵다'고 생각됐는데, 이제 그 어려운 기사를 써야하네요.
좋은 단독기사 많이 취재하고 발굴해야하는데 얼마나 빨리 적응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다행히 서초동에서 옛날 경찰 출입 동기, 선후배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인데 잘 지내고 노력해야죠.
변화는 항상 사람을 성장하게 만들잖아요.
또 한번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같습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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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남아공의 '부부젤라'가 단연 화제였죠.
우리나라 조선부부젤라도 인터넷에 사진이 떠다녔었는데요.

오늘의 러시아어는 '까끄 젤라'입니다.

러시아 사람들을 만날 때 꼭 물어보는 말이 '까끄 젤라(Как дела)' 인데요
까끄(원래 발음은 깍~으로 합니다)는 '어떻게'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이름을 물을 때도 '까그 지뱌 자붓'(Как тебя зовут/ 네 이름은 뭐니?) '까끄 바스 자붓' ( Как вас зовут/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등에도 '깍'이 들어가죠.

처음 만난 사람이 아닌경우에는 항상 첫 마디가 '까끄 젤라(어떻게 지냈습니까)' 이죠.
어떻게 지냈니, 잘 지냈어? 라고 물으면

하라쇼!(Хорошо/ 좋다)  
쁠로허!(Плохо/ 잘 못지내)
나르말나!(Нормльно/ 그럭저럭)

라고 답합니다.
나르말나는 영어 노말(nomal)과 의미가 같은데요, 일상 생활에서도 정말 많이 쓰입니다.

부부젤라처럼 불 수 있는 나팔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러시아 사람을 만났을 때
'깍 젤라?" 한번 물어봐주면, 러시아 사람들은 아마 "하라쇼!"라고 답할 것입니다.

*^^* 스빠씨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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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토토에서 발행한 책자에 정리된 '대한민국 월드컵 도전사'를 올립니다.
짧게 정리가 잘 되어있네요.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영욕의 월드컵 첫 걸음
          *목숨을 걸고 뛴 한일전
한국이 제5회 스위스월드컵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극동지역 예선전을 치러야 했다. 예선전의 상대국은 일본.
FIFA 방식에 의해 홈 앤 어웨이로 도쿄에서 한 번, 서울에서 한 번 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기 이전이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인의 한국 입국을 불허했다. 결국 한국은 예선 2경기를 적지인 일본에서 가져야 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대한민국은 1차전 5-1승, 2차전 2-2무승부를 기록하며 월드컵 출전 티켓을 거머쥐었다.

         *한 대회 최다 실점의 치욕
스위스로 향하는 선수단 22명은 항공편을 구하는 것부터 벽에 부딪쳤다. 22명을 모두 태울 수 있는 비행편이 없어 2조로 나눠 스위스로 향했다. 스위스까지의 비행시간은 무려 48시간. 헝가리, 터키, 서독과 함께 B조에 속한 한국은 당시 축구 최강국이었던 헝가리를 맞아 0-9로 무릎을 꿇었다. 이는 아직도 한 경기 최다골차 패배 기록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 경기인 터키전에서도 실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0-7 완패를 당했다. 2연패를 당한 한국의 예선 탈락.

단장 김윤기 감독 김윤식
GK 홍덕영 함흥철 DF 박규정 이종갑 박재승
MF 이상의 김지성 강창기 한창화 민병대 주영광
FW 이수남 박일갑 정남식 최정민 성낙운 정국진 최영근 이기주 우상권

1958~1982년
          좌절의 시기
          *협회 실수와 정치색으로 얼룩진 침체기
1957년 한국은 월드컵 참가 신청 기간을 넘기는 바람에 예선 참가권을 박탈당했다.
1962년 칠레월드컵. 한국은 아시아동부지역 예선에서 일본을 눌렀지만 유고와의 최종예선 두 경기에서 2연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을 벼르던 한국은 강팀 북한의 등장에 지레 겁을 먹고 월드컵 예선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결국 FIFA로부터 벌금 5,000달러를 부여받았다.

          *도약을 위한 체제 확립 시작
1966년 북한의 맹활약에 자극받은 한국은 축구 발전을 위해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외국인 지도자 1호인 서독 출신의 크라우츤코치를 영입, 1년 동안 한국축구를 지도하기로 했다. 이후 유럽 원정훈련 길에 오르는 등 국제 경쟁력 강화에 힘썼지만 이후 연거푸 호주에 밀려 월드컵 참가는 좌절되고 말았다. 1982년에는 쿠웨이트에 패하며 꿈을 이루지 못했다.

1958년 최종예선 탈락, 1970년 최종예선탈락, 1974년 최종예선 탈락, 1978년 최종예선 탈락, 1982년 최종예선 탈락

1986년 멕시코월드컵
          32년 만에 본선무대 진출 감격
          *험난했던 멕시코행 티켓
한국은 1차 예선 말레이시아 원정경기에서 0-1로 패했다. 문정식 감독이 해임되고 김정남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한국은 말레이시아를 홈으로 불러들여 2-0 승리를 거두면서 조1위로 2차 예선에 진출했다. 2차 예선에서 인도네시아를 가볍게 물리친 한국은 일본과 만나 원정 1차전에서 정용환과 이태호의 골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홈에서 치러진 2차전도 허정무의 골로 승리. 1954년 이후 32년 만에 월드컵무대를 밟게 됐다.

           *월드컵 첫 골, 첫 승점의 환희
한국은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불가리아와 함께 A조에 속했다. 1차전 상대인 아르헨티나에는 당시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디에고 마라도나가 버티고 있었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0-3으로 끌려 다니던 후반 28분, 박창선이 25m 총알 중거리슛을 내리꽂아 월드컵 무대 최초의 득점에 성공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차전 상대인 불가리아와 1-1로 비긴 한국은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와 맞붙었으나 2-3으로 패하고 말았다.

단장 한흥기 감독 김정남 코치 김호곤
GK 오연교 조병득 DF 박경훈 정종수 정용환 조영증 김평석 김민국 유병옥
MF 김용세 조광래 박창선 노수진 허정무 김삼수 강득수 이태호
FW 최순호 차범근 김주성 변병주 김종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최초 2회 연속 본선무대
           *안정된 전력으로 무패행진 구가
1986년 멕시코월드컵의 주축멤버들이 대거 포함됐던 당시 대표팀은 아시아 최강국다운 전력을 뽐냈다. 한국은 아시아 1차 예선에서 네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 함께 예선 4조에 편성됐다. 한국은 6전 전승을 기록하며 무패행진을 펼쳤다. 최종예선에 진출한 6개국 중에 무실점으로 오른 것도 한국이 유일했다. 한국은 1,2차 예선을 통틀어 9승2무, 29득점 1실점을 기록하며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통틀어 최초로 2회 연속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됐다.

            *기대치 밑돈 초라한 성적
한국은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와 E조에 속해 멕시코월드컵보다 수월한 조편성을 받았다. 그러나 1차전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0-2로 패하고 말았다. 2차전은 '무적함대'스페인. 한국은 황보관의 대포알슛으로 기세를 올렸지만 1-3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예선 탈락이 확정된 한국은 우루과이전에서 명예회복을 노렸지만 후반 25분 윤덕여의 퇴장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며 0-1로 패하고 말았다.

단장 이재명 감독 이회택 코치 이차만 이세연 트레이너 허정무
GK 최인영 최풍주 정기동 DF 홍명보 정용환 구상범 최강희 박경훈 윤덕여
MF 이흥실 노수진 이상윤 김주성 이영진 정해원 조민국 정종수
FW 최순호 황순홍 변병주 황보관 이태호

1994년 미국월드컵
           10초 기적과 월드컵 진출
            *2002 월드컵 개최 기운 모락모락
한국은 아시아 예선 1차전을 무난하게 통과했다. 최종예선은 한국을 포함한 북한,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 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풀리그로 벌어졌다. 조 1,2위가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 한국은 최종예선에서 일본에 0-1로 패하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마지막 경기인 이라크와 일본의 경기에서 이라크가 후반 인저리타임에 극적인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한국을 도와 어부지리로 본선 진출권을 획득했다.

            *폭염 속에 빛난 투지
독일, 스페인, 볼리비아와 예선 C조에 편성된 한국. 한국은 첫 상대 스페인을 맞아 의외로 잘 싸웠다. 2-0으로 밀리다가 홍명보와 서정원의 골로 극적인 무승부를 이루어냈다. 이제 볼리비아만 꺾으면 16강 진출도 가능했다. 그러나 한국은 득점 없이 비기고 말았다. 독일과 3차전. 0-3으로 뒤지던 후반, 한국은 황선홍과 홍명보의 골로 맹추격하며 희망을 살리는 듯 했지만 결국 추가골을 넣지 못하고 2-3으로 분패했다.

단장 함흥철 감독 김호 코치 허정무 트레이너 박항서 오연교
GK 최인영 이운재 박철우 DF 홍명보 이종화 박정배 안익수 최영일 김판근 정종선 구상범
MF 이영진 고정운 하석주 최대식 최문기 신홍기 김주성 노정윤  FW 황선홍 조진호 서정원

1998년 프랑스월드컵
           불운과 치욕으로 얼룩진 무대
           *광란의 도쿄대첩
1996년 한국축구는 환희로 가득했다. 2002년 월드컵 개최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을 출범시켰다. 한국은 3승1무로 가볍게 1차 예선을 통과해 최종예선에 합류했다. 한국은 B조에서 일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UAE와 조1위를 놓고 다퉜다. 한국은 일본전 역전승을 포함해 6경기에서 5승1무를 거두며 일찌감치 조1위를 확정, 4회 연속 월드컵 진출을 이뤄냈다.
 
          *차범근 감독 월드컵 도중 해임
본선1승과 16강 진출 목표를 가지고 프랑스로 향했던 '차범근호'는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 한 조가 됐다. 멕시코와 1차전, 하석주가 전반 28분 선제골을 성공시키며 축제분위기를 연출했지만 2분 뒤 하석주는 백태클로 퇴장을 당하고 말핬다. 결국 1-3 역전패. 이후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에 0-5 참패가 이어지자 협회는 차범근 감독을 해임했다. 한국은 벨기에와 마지막 경기에서 1-1로 비기며 최소한의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단장 조중연 감독 차범근 코치 김평석 트레이너 정성진
GK 김병지 서동명 DF 홍명보 장대일 최영일 이민성 이임생 이상헌 김태영 장형석 
MF 유상철 하석주 최성용 김도근 이상윤 고종수 노정윤 서정원 FW 황선홍 김도훈 최용수 이동국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회를 쏘아올린 홈잔치
           *본선에서 진가를 드러낸 '히딩크호' 압박축구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은 명장 거스 히딩크 감독을 선임했다. 히딩크 감독은 파워 프로그램으로 태극전사들의 체력을 끌어올리며 많은 활동량과 강력한 압박을 요구했다. 드디어 본선 첫 경기, 한국은 복병 폴란드를 맞아 황선홍과 유상철의 기분좋은 골로 2-0, 월드컵 진출 48년만에 감격적인 첫 승의 기쁨을 맛보았다. 미국과 2차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한국은 포르투갈을 맞아 박지성의 멋진 발리슛으로 승리하며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뤄냈다.

           *골든골과 승부차기 승의 짜릿함
16강 진출에 성공한 한국.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아직도 배고프다'라는 말로 선수들의 투지를 끌어올렸다. 이탈리아전에서 한국은 후반전, 설기현의 동점골과 연장전 안정환의 극적인 골든골로 8강에 진출했다. 8강 상대는 무적함대 스페인. 한국은 전후반 90분과 연장 30분을 득점 없이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승리하며 아시아 최초로 4강 진출의 위업을 이뤘다. 이후 한국은 독일과 터키에 패하며 4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단장 이갑진 감독 거스 히딩크 코치 핌 베어벡 트레이너 박항서 정해성 김현태 
GK 이운재 김병지 김은성 DF 홍명보 김태영 최진철 이민성
MF 유상철 이영표 송종국 박지성 김남일 이을용 윤정환 최성용 현영민 최태국 
FW 황선홍 최용수 안정환 설기연 이천수 차두리

2006년 독일월드컵 
            기대감에 비해 허무했던 '라인강의 기적'
            *중동의 모래바람을 잠재우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 업적을 이뤘던 한국이기에 최종예선 통과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한일월드컵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해외에 진출했던 박지성과 이천수, 이용표 등 4강 주역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이로 인해 한국축구가 고전을 면치 못했던 중동팀들도 이제 더 이상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예상대로 본선 진출 성공. 그러나 한국은 조 본프레레 감독을 퇴진시키고 딕 아드보카트 감독 체제로 월드컵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월드컵 원정 첫 승에 만족
본선 1차전 상대는 월드컵 무대에서 처음으로 만난 아프리카팀인 토고. 한국은 먼저 첫 골을 내줬지만 이후 전열을 정비하여 이천수의 동점골과 안정환의 결승골로 기분 좋은 역전승을 이뤄냈다. 2차전 상대는 프랑스. 한국은 프랑스를 상대로 잘 버텨내며 무승부를 기록, 16강 꿈을 이어갔다. 하지만 끝내 스위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16강 탈락의 아픔은 너무나도 컸다.

단장 이회택 감독 딕 아드보카트 코치 핌 베어벡 압신 고트비 홍명보
GK 이운재 김영광 김용대 DF 이영표 김상식 김영철 송종국 조원희 김동진 최진철 김진규
MF 이을용 백지훈 이호 김남일 박지성 김두헌 
FW 박주영 설기현 이천수 정경호 조재진 안정환

2010 남아공월드컵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금자탑
            *국내 지도자는 안된다는 불신 여전
2007년 12월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게 된다. 허정무 감독은 2000년 이후 7년 만에 다시 대표팀 사령탑에 복귀했다. 허 감독 부임 후 한국은 A매치 무득점 공포를 이겨냈지만 여전히 시선은 곱지 않았다. 감독 교체설까지 흘러나왔다. 그러나 대표팀은 꾸준하게 승점을 챙기며 전진했다. 한국은 허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 데뷔전인 칠레전에서 패한 뒤 최종 예선까지 10경기(5승5무) 연속 무패행진을 달렸다.
      
             *최악의 조편성을 '허심'으로 뚫다 
한국은 최종예선에서 최악의 조편성을 받게 된다. 예선 2조에 속한 한국은 중동의 강자 사우디와 이란에 껄끄러운 상대 북한, 복병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남아공 티켓을 다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비마다 젊은 선수들과 고참선수들의 조화로운 플레이로 난관을 극복하며 마침내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뤄냈다. 최종예선을 4승4무로 마무리했다. 한국은 아르헨티나, 그리스, 나이지리아와 함께 본선 B조에 속해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감독 허정무 코치 정해성 김현태 박태하 (월드컵 예비명단)
GK 이운재 정성룡 김영광 DF 차두리 곽태휘 김형일 이정수 이영표 오범석 조용형 김동진
MF 김남일 기성용 김정우 박지성 이청용 신형민 김재성 김보경 구자철 염기훈
FW 이승렬 안정환 박주영 이근호 이동국

2010년 6월 23일 한국은 나이지리아를 누르고 원정경기 사상 처음으로 16강전 티켓을 손에 거머쥐었다. 그리고 26일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 1-2로 아쉽게 패하며 2010 남아공월드컵을 아쉽게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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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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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남아공 월드컵 취재팀 파견나와있습니다.
남아공 현장으로 날아간 것은 아니고요, 매일 회사로 출근해 월드컵 취재팀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중간에 차출됐어요.)
블로그 글 업데이트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 사과드리고요, 한국 경기가 끝나는 날까지
좋은 경험 쌓고 복귀해서 글 올릴게요.

감사합니다.
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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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구글에서 음성검색 서비스를 공개하면서 "한국의 방언(사투리)를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한 단어의 여러가지 억양과 발음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땅 덩어리도 작은 나라에서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각 지방마다 발음이 다 다르이때문에 가끔 한국사람끼리도 소통의 부재가 생기는 경우가 있지요.

남한과 북한을 합친 영토의 77배나 되는 러시아는 어떨까요.
러시아에는 방언이 없습니다. 우리가 서울말을 표준으로 채택해서 사용하지만, 러시아는 모스크바나 극동지역이나 어디든 다 똑같은 '표준어'를 사용합니다. 어떻게 그 것이 가능하냐고요?

러시아는 영토에 비해 인구가 많지 않습니다. 땅이 워낙 넓다보니 모스크바에서 인구조사를 시작해서 시베리아를 지나 블라디보스톡으로 갈 때쯤되면 이미 통계가 다 바뀌어있다고 합니다. 현재 러시아 인구는 1억3천~1억 5천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다가 1703년 피터(뾰뜨르) 대제가 상트페레트부르그(St.Petersburg)를 만들면서 발틱해 연안으로 이동해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생겼고, 그 무렵부터 러시아는 넓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지방으로 이전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많이 줬다고 합니다. 1860년경에 블라디보스톡이나 하바로브스크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만큼의 영토를 제공해주고, 인근 마을마다 세워진 학교에서 '표준어'로된 수업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육을 했다고 합니다.
1900년도 초쯤에 라디오가 널리 보급되면서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누구나 라디오를 들으며 통일된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요. 

그런데 가끔 사할린이나 완전 시골지역에서 모스크바로 올라온 사람들 중에는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처럼 억양이나 발음 차이가 심하게 나는 것은 아니고요. 알파벳 오(o) 발음을 무조건 '오'로 읽는거죠.
예를들어 '좋다'는 의미의 하라쇼를 써 있는 철자대로 읽으면 '호로쇼' (Хорошо)가 되는데 발음 엑센트는 중간에 세번째 오에 붙어 있어서 그 이전 오 발음은 '아', '어'의 중간 발음으로 해야하는 규칙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런 규칙을 무시하고 무조건 오를 오로 읽는 경우입니다.

"하라쇼!"라고 발음하지만 철자는 '호로쇼'로 씁니다.
헤어질때 안녕! 이라고 말하는 빠까(Пока)도 철자대로 하면 '뽀까'가 되겠지만 엑센트가 끝에 에이에 붙어있어서 '빠까'로 발음하거든요.

1990년에 한러수교가 체결되고 국내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했던 노어노문과 학생들이 러시아에 갔을 때 이 '오'발음을 제대로 못해서 러시아인들과 커뮤니케이션을 못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호로쇼, 뽀까, 도스비다냐(다스비다냐/안녕히가세요) 등...
심지어 기차역인 '바그잘(Вокзал)'을 '보크잘'로 써있는대로 그대로 읽다가 놀림을 받았던 학생도 본적이 있습니다.
워낙 방언이 없는 나라다보니까 발음이 다른 것을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러시아에서도 무엇이든, 어떤 상황에서든 가장 많이 쓸 수 있고, 통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하라쇼!'이지요. 상대방의 의사를 물을 때도 '하라쇼(좋다)'라고 답하고, 상대방이 동의 하는지 의견을 물을 때도 하라쇼?! 라며 끝에 억양을 올리며 동의를 구합니다. 스빠씨버만큼 많이 쓰이는 하라쇼!

정말 좋고, 정말 괜찮을 때는 앞에 매우(오친/Очень)를 붙여서
'오친 하라쇼!'라고 말하면 됩니다.


하라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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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로호 발사가 실패를 하면서, 2008년 4월8일 이소연씨가 우주로 날아가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봤습니다.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에서는 소유즈 우주선이 발사되는 곳과 1.5km 떨어진 곳에 세계 최초여성우주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와, 세계 최초로 우주를 유영한 알렉세이 레오노프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출장을 떠나기 전부터 발렌티나 테리시코바와 관련된 인터뷰 기사를 읽고, 또읽었으며, 그의 젊은 시절 사진부터 70대 모습까지 앞모습, 옆모습을 익혔습니다. 국내에서는 이소연씨가 ‘우주인이다, 아니다’라는 자격 논란이 있었지만, 왠지 그 현장에는 발렌티나 테리시코바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로 출장을 떠나기 전, 러시아 대사관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 러시아 연방우주청 공보담당관 전화번호를 따냈습니다. 시차를 맞춰가며 통화를 시도하고, 이메일을 보내며 연락을 취한 끝에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4월 8일 바이코누르로 가는 전용기에 탑승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죠.


교육과학기술부, 항공우주연구원에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인터뷰를 요청한다’고 했지만 “불가능하다. 스케줄 확인조차 어렵다”고 말했었지요. 간절히 원하고 원했던 까닭인지, 러시아 출장길에 모스크바를 들러,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 가서 소유즈호가 하늘로 발사되는 광경을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와 함께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박종구 교과부차관과 한국 기자단이 관람을 했던 위치는 야구장 1루석쯤 됐습니다. 정 중앙에는 3층 건물이 있었고, 소유즈 우주선을 정 중앙으로 바라보는 그곳에는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매일경제 김은표 선배가 취재 기자단 간사를 하는데, 선배에게 이야기를 했죠.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인터뷰를 꼭 따내고 싶다. 저 건물 안에 있을 것 같은데, 인터뷰 성공하면 꼭 풀을 할테니 나만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김 선배는 박종구 차관을 불러 얘길 했습니다. “임기자만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러시아 경비에게 저는 정부측 사람인 것으로 얘길하고 들어갔지요. 3층 건물은 경비가 삼엄했는데, 박 차관과 이소연씨 가족이 발사 장면을 지켜보는 그 곳 주변을 3바퀴쯤 맴돌며 경비가 삼엄한 그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2-3바퀴쯤 돌면서 입구와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데,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는 난관에 어떤 할아버지를 러시아 방송 기자들이 인터뷰하고 있더라고요. 갑자기 사람들이 “어, 레오노프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알았는데, 레오노프는 잘 몰랐습니다. --;

일단 저기다 싶어서 1층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죠.

중앙 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에 계단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2층을 지나 3층으로 올라가는데 레오노프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고, 철 사다리같은 난간 위쪽으로 검은색 선글래스를 낀 한 70대 여성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였죠.


어렵게 다가갔습니다. “한국에서 온 기자인데, 잠깐 인터뷰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한 마디로 딱 잘라서 말했습니다.

 “음. 여긴 나만 보는 장소인데. 미안하지만 내려가 줘요. 당신 얼굴에 ‘한국사람’이라고 써있으니, 멀리서 왔다고 설명 안 해도 한국에서 온 기자인지 알겠어요.”

좀 당황스러웠지만, 그냥 내려갈 순 없었죠. 보름 넘게 준비한 인터뷰였고, 사실 1963년 세계 여성 최초로 우주를 갔던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소연을 바라보는지 궁금했습니다.

“딱 1분만요. 1분만 있다가 내려갈게요. 재촉하지 마세요.”..

난 그렇게 그와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부유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 소련이 미국과 우주 경쟁을 벌이며 세계 최초 여성 우주인을 누가 먼저 탄생 시킬 것이냐 신경전을 벌일 당시 높은 경쟁률을 뚫고 관문을 통과했던 여성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 ‘마이’라는 유명 항공하고 출신 지원자도 있었지만, 불우한 형편에 지방에서 생활하며 공장에서 일을 했던 그녀에게 ‘천운’의 기회가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죠.


“1963년, 당신이 저기 저 소유즈 안에 있었을 때 어떤 마음으로 기도를 했나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텐데, 그때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나요.”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입을 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했지요. 눈을 뜰 수 없었죠. 왜 긴장이 안됐겠어요. 난 1년 넘게 치열한 체력 테스트를 받고, 혹독한 훈련을 했어요.”

“당신은 45년전 ‘조종사’신분으로 우주를 갔지만, 이소연씨는 ‘연구원’신분으로 우주를 가요. 아무래도 준비 과정이나 우주에서 임무 수행하는 영역에서 차이가 있을텐데. 이소연씨에게 선배로써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어요.”

“음... 이소연은 즈뵤즈드늬이 고로독(star city)에서 잠깐 봤어요.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지만, 속이 깊고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죠. 이소연씨가 연구인 신분으로 우주를 가던, 내가 조종사 자격으로 갔던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의 깊이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우주에서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같지 않나요.”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이소연에 대해 부정적인 야이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방송이 나왔고, 소유즈 호가 발사된다는 신호가 나왔다.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나에게 “난간을 꼭 잡으라”고 조언했고, 잠시 후 강한 지진이 일어난 것 처럼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울리면서 나는 정면에서 소유즈호가 발사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나로호가 비스듬이 발사되는 것과는 다르게 소유즈는 정 중앙으로 반듯하게 하늘로 올랐습니다. 마치 용이 땅 아래로 불을 뿜듯 강한 열을 쏟아내며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두려웠습니다. 온 몸으로 느껴지는 전율이 마치 나를 귀머거리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이 나의 두 귀를 감싸고, 두 눈은 우주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방송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다’며 소유즈 우주선이 어느 높이만큼 날아갔는지 중계를 해줬고, 레오노프는 “우라!(만세)”를 외치며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고 좋아했죠.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할머니는 “얼마나 아름다운 전율이냐!”며 감탄사를 내뿜었다.



(사진설명. 2008년 4월 8일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발사대 정 중앙 건물 3층에서 세계 최초 여성우주인 발렌티나테레시코바(가운데)와 알렉세이 레오노프와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소유즈가 우리 시야를 벗어나고, 시간이 40분쯤 경과됐을 때 “한나(러시아에서 쓰는 제 이름), 우리 같이 내려가서 샴페인을 터뜨리자”고 제안을 했죠.

건물 2층에는 가슴에 완장을 차고있는 러시아 연방우주청 관계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샴페인을 터뜨리고 초콜릿을 먹으며 ‘또스트(축사)’를 건넸죠.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슬라바 보그! (하나님께 영광을~!). 먼저 오늘 소유즈가 성공적으로 발사된 것이 참으로 기쁘다. 우리가 봄, 가을마다 우주선을 쏘아올리면서 이렇게 수익을 거둘 수 있어서 다행이다. 우주산업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여기 있는 여러분과 나는 실업자로 전락했을텐데, 다행이 우리는 먹고 살 걱정 없이 이렇게 잘 살고 있다. 올 가을에도 이곳 바이코누르에서 우주선이 발사 될텐데, 문제 없이 성공을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


그녀의 축사는 내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돈을 위해, 순전히 돈을 받고 연례 행사로써 한국의 우주인을 배출한 것이었다는 고백을 듣는거나 다름 없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우주인을 배출하고 싶은 여러 나라들로부터 돈을 벌어들여서 달탐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우주 사업을 확장하는데, 우린 우리기술로 우주선은 커녕, 제대로된 우주인 하나 배출할 수 없어서 ‘연구원’신분으로 첫 우주인을 보내야했다는 게 마음이 아팠습니다.


10일게 모스크바 임무통제센터(MCC)에서 만난 러시아 신문 매체의 한 기자는 내게 다가와 물었죠.
“정말 이해가 안된다. 러시아에서 지금까지 우주인을 보내면서 한 번도 ‘연구원’이란 신분으로 보낸 적이 없다. 이소연씨도 한국에서 과학도였던데, 물론 준비 기간이 짧긴 하지만 이건 정말 이해가 안된다. 한국에서도 우주관광객 논란이 있었다고 하던데, 좀 안타깝다”고.

 

그날 기자회견장에서 난 러시아 연방우주청 관계자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제작한 카달로그에 이소연씨 신분이 ‘우주인’이 아닌 ‘연구원’ 신분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러시아에서도 이소연씨를 진정한 ‘우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 아닌가.”

러시아 연방우주청 관계자는 “우주인이냐, 연구원이나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며 명쾌하지 않은 답변을 늘어 놓았습니다.


다음날(11일) 한국 기자단은 모스크바 쉐르메쩨보 공항을 통해 출국을 했고, 나는 러시아 우주인의날(4월12일) 기념 행사가 즈뵤즈드늬이 고로독(star city)에서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스크바 북동쪽에 차량으로 한 시간쯤 이동해야하는 그곳으로 갔습니다.


모스크바 전철역 숄코프스카야(?)에서 마르쉬루트(봉고 택시)를 탔죠. 렌트를 해서 갈 수도 있었지만, 가는 길에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쳐보고 싶었습니다.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인 만큼 가는 길, 골목 골목을 눈과 가슴에 담고 싶었죠.

봉고 택시에 타서 차비를 내고 거스름돈을 돌려받을 때 쯤 내 왼쪽에 앉은 60대 아저씨가 제게 말을 건냈습니다. “스타 시티에는 무슨일로 가냐?”고. 저는 “만날 사람이 있어서 간다.”고 답했죠. 한참을 그분과 얘기하다보니 그분은 이소연, 고산씨가 훈련을 받았던 스타 시티에서 이소연과 고산을 가르쳤던 교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분은 말했습니다.

“지금 스타시티에 일본인 우주인들이 훈련을 받고 있어요.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앞서서 러시아에서 우주인을 배출하면서 깨달았는지, 지금은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을 보내왔어. 고산이나 이소연씨랑 수업할 때는 사전 놓고, 가끔 통역 불러 수업하곤 했는데, 일본 사람들은 스폰지처럼 흡수하더라고. 언젠가 한국도 그런 날이 오겠지? 그러다보면 한국 기술로 우주인을 배출할 날도 올테고. 궁금증이 많은 아가씨, 그럼 또봐요. 난 오늘도 수업이 있어서....” (관련기사, 월간조선 2008년 5월호)


봉고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 그 아저씨는 서둘러 내렸습니다.

저는 스타시티 구석 구석을 취재할 순 없었지만, 행사장 안에서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와 레오노프 할아버지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었고, 취재 계획의 소기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왔습니다.


사실 우주선이 발사되던 날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의 축사 멘트는 한동안 내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 나라가 있어서..... 우리가 실업자가 안되고.....”


오늘 나로호 발사가 실패됐고, 러시아는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궁금하네요.

3차 발사가 언젠가 이뤄지겠지만, 사실 우주 사업 프로젝트의 핵심은 ‘기술 이전’인데, 2년전 이소연씨가 우주에 갔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우린 ‘러시아’라는 우주 강국 앞에서 눈치만 보면서 할 말 못하고, 끌려가듯 사업을 진행하는 게 아닌지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회사에서 야근하다가 방송 중계 자료 화면에 2008년 4월 8일 자료화면을 봤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오늘은 그 당시 기사로 못 다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어 몇 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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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гражданина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пострадавшие в ДТП под Петербургом, - в тяжелом состоянии


04.06.2010, 17.22

지난 4일 오후 5시 22분께
이타르타스통신에 올라온 기사입니다.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4 июня. /ИТАР-ТАСС/. Одиннадцать граждан Южной Кореи, пострадавших сегодня утром в дорожно-транспортном происшествии под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ом, остаются в больницах города. Состояние двоих из них оценивается как тяжелое, один пострадавший выписан из больницы. Об этом корр.ИТАР-ТАСС сообщили в генеральном консульстве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в Петербурге.


상트 페테르부르그, 6월 4일, 이타르타스. (한국시간으로 4일 오후 10시 22분)

4일 오전 상트 페레르부르그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해 한국인 11명이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으며 2명은 중태에 바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주러시아 상트페레르부르그 한국 총영사관 말을 인용, 이타르타스통신이 보도했다.

По словам собеседника агентства, в микроавтобусе находилось 13 граждан этой страны и водитель - житель Узбекистана. В результате аварии один человек погиб. В консульстве сообщили, что все граждане Кореи, пострадавшие в ДТП, сотрудничали с заводом "Хендэ" по договору субподряда.

사고 발생차량은 중형봉고차로 운전기사와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사람을 포함해 총 13명의 한국인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사고 발생 당시 현장에서 한명은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타르타스통신에 따르면 병원 치료중인 한국인들은 상트페레트루브르 현대 공장에 하청업체 직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Авария произошла в 07:40 мск на Выборгском шоссе. Маршрутное такси, двигавшееся без пассажиров, врезалось в микроавтобус "Газель".
 
교통사고는 이날 오전 7시 40분께(모스크바시간) 븨보르스크 고속도로에서 발생했다. 고속도로에서 마주달리며 오던 차량은 탑승자가 없었고, 중형 봉고차 '가젤' 차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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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사고 발생시각을 보니 오전 출근길에 사고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지난 1월에 모스크바 출장가면서 LG전자, 삼성전자 공장 방문했을 때 공장에서 근무하시는 직원 분들이 모스크바 시내에서 통근버스 타고 매일 1시간~1시간 30분씩 출퇴근을 하더라고요. 운전자가 졸음 운전하는 경우는 드믈지만 상대편 운전자가 졸음운전 해서 큰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습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에 현대 공장이면 현대자동차 공장 아니면 모비스 공장인 것 같은데, 이쪽 협력업체 직원분들이 출근 길에 사고를 당하신게 아닌지 걱정되네요.

그리고 제가 '중형봉고차'라고 번역한 '미크로 아브토부스, 마르쉬루뜨노에 탁시' 등이 있는데
러시아에는 일반 버스 외에 15인승 봉고 차량을 중형 택시로 이용합니다. 요금은 일반 버스보다 약간 비싸고, 택시보다는 훨씬 저렴해서 봉고차 택시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사고를 낸 가젤은 봉고차 택시였는데 다행히 승객이 없었다네요. --;;
Posted by mos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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